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가을 물든 숲은 붉은 바다, 마음까지 붉게 빠진다

(61) 서울 서남부, 호암산에서 독산자연공원까지

등록 : 2022-10-27 15:35
호암산 바위절벽 꼭대기에서 본 서쪽 풍경. 초록숲과 단풍숲이 어울렸다.

단풍 짙어지는 숲속에서 눈 감아본다

바람소리와 새소리에 귀가 눈이 된다

햇살도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건다

눈을 뜨면 하늘은, 단풍에 싸인 호수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관악구 신림동이 경계를 나누는, 호암산에서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지는 숲길을 걸었다. 호암산 절벽 꼭대기에서 굽어본 산하, 도심으로 뻗은 초록의 숲에 단풍이 번진다. 가을이 더욱 깊어진 날 호암산~호압사~목골산~관악산생태공원(선우공원)~독산자연공원 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갔다.


목골산 숲길에 피어난 꽃향유.

치유의 숲을 지나 호암산 절벽 꼭대기에서 숲을 굽어보다

호압사 일주문 왼쪽 옆 숲으로 들어갔다. ‘호암산 산림치유 숲 태교센터’라는 안내판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숲 그림자 비치는 작은 연못을 보고 정자 옆 데크길로 접어들었다.

‘산림치유 숲 태교센터’ 건물과 향기원이 나왔다. 나무 냄새, 숲을 지나는 바람의 감촉, 새소리, 오감으로 느끼는 숲이 태교에 좋다는 설명이 태교센터 안내판에 적혀 있다.

그 옆 향기원은 숲에 안긴 작은 쉼터다. 향기원 가득 햇살이 고였다. 아주머니 한 분이 꽃밭 앞 의자에 앉아 얼굴을 들고 햇볕을 쬐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 앉아 눈을 감고 얼굴을 햇살에 맡겼다. 햇살의 촉감이 느껴졌다. 눈을 감으니 소리가 보였다. 바람 소리를 들으면 나부끼는 단풍잎이 아른거렸다. 새소리를 들으면 나뭇가지에 앉아 부리를 쫑긋거리는 새가 떠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숨은 몸속 깊은 곳까지 스몄다가 서서히 차올라 산들바람처럼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숲은 고요하고 몸은 산뜻해지고 마음은 평온해졌다.

정해놓은 규칙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순간이 되니 눈은 자연스레 떠졌고 언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지도 저절로 알았다. 내키는 대로 온몸을 쭉쭉 뻗고 굽히고 큰 숨을 쉬었다.

샘터를 지나 만난 숲속 쉼터에는 하늘을 보며 누울 수 있는 긴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의자에 누우면 숲의 천장이 보인다. 푸르다.

숲 밖으로 나와 호압사 절 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단풍이었다. 500년 느티나무도 어린 느티나무도 다울긋불긋하다.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되니 그 빛깔이 더 도드라진다. 공양간 장독대 옆에 홀로 선 나무는 텅 빈 공중으로 가지를 뻗었다. 가지 옆 하늘에 낮달이 떴다. 그믐으로 가는 반달이다.

호압사를 뒤로하고 호암산 절벽 꼭대기로 향했다. 가파른 산비탈에 놓인 데크 계단을 걷는다. 어두컴컴한 숲을 지나 하늘이 열리는 곳에 단풍이 물들었다. 햇볕이 숲 밖에서 빛나니 단풍잎은 후광을 입었다.

산비탈 돌길, 바윗길을 올라 호암산 정상에 도착했다. 암반바위 가득한 정상, 그 절벽 끝에 서서 산하를 굽어본다. 호압사를 품은 숲이 도심으로 뻗어나간다. 단풍과 초록의 숲이 어울렸다. 저 아래 보이는 숲과 도시가 만나는 경계까지 걸을 것이다.

선우공원 숲에 단풍이 물들어간다.

목골산 능선길을 걸어 관악산생태공원(선우공원)에 도착하다

호암산 절벽 꼭대기에서 보았던 숲으로 들어간다. 그 첫머리는 호압사 경내 호암농장이다. 호암농장 무밭에 무청이 푸르다. 너울거리는 푸른 물결 같다. 그 옆 커다란 소나무는 쇠기둥에 가지를 의지하고 서 있다. 호압사 소나무숲을 왼쪽에 두고 걷는다.

이내 목골산으로 가는 능선길로 접어들었다. 빼어난 풍경, 기이한 바위 하나 없는 숲길이다. 그래서 발치의 작은 풀꽃에도 눈이 가고 공중에서 나부끼는 나뭇잎이 숲에 떨어지는 궤적도 보였다.

선우공원까지 2.4㎞ 남았다고 이정표가 알려준다. 산 아랫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이 숲길이다. 마을과 산을 오가는 길은 샛길이 됐다. 샛길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사람들은 이 숲도 일상이다. 멀리 보이는 길 끝 한쪽이 붉다. 길가에 무리 지어 피어난 꽃향유였다. 꽃향유 덕에 숲길 발치가 붉게 빛난다. 스트로브잣나무 숲은 아주 작았다. 숲길 바로 옆에 있는 그 숲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밖에 안 됐지만 잣나무 숲을 걷는 느낌은 또 달랐다.

넓은 흙길은 계속 이어졌다. 시흥5동으로 빠지는 샛길과 금천정으로 가는 이정표에서 금천정 방향으로 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흥4동과 독산동 방향 갈림길이 나왔다. 숲속 갈림길이자 동네와 동네를 잇는 고갯길이었다.

목골산 능선의 서쪽은 시흥동이고 동쪽은 난곡으로 불리던 난향동이다. 선우공원은 북쪽으로 가면 나온다.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 커다란 돌무지 옆 긴 의자가 덩그렇다. 햇살이 숲으로 비껴들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낮은 고개를 하나 넘으니 선우공원이다. 목골산 숲길은 선우공원 위쪽 끝으로 이어졌다.

선우공원과 독산자연공원, 단풍이 마중하고 시가 배웅하는 숲길

선우공원 단풍나무숲이 사람들을 마중나왔다. 푸른 잎과 단풍 물든 잎이 섞여 오후의 햇살에 빛난다. 아까부터 단풍나무숲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 등에도 단풍이 물들 것 같았다.

생태연못 주변은 아이들 차지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엄마들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걷는다. 생태연못과 야외학습장, 계곡 등 공원 곳곳에 보이는 풍경은 훼손된 계곡을 복원해서 꾸민 것이다.

돌아본 풍경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생각나 생태연못을 지나 숲 아래로 가는 길에 뒤를 돌아봤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숲이 생태연못을 감싸고 있었고 열린 숲 위에 연못만한 하늘이 고여 있었다.

단풍 낙엽 쌓인 선우공원 숲.

초록빛, 노란빛, 붉은빛이 감도는 숲을 걸었다. 어깨를 풀어주는 운동기구를 돌리던 아주머니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숲을 떠난다. 저녁 지을 시간인가보다. 나뭇잎을 통과한 파스텔톤의 햇볕 가루가 텅 빈 숲바닥부터 쌓이는 것 같았다.

이맘때 사람 발길 드문 숲은 낙엽으로 가득하다. 낙엽이 쌓여 길도 지워졌다. 노랗고 빨간 나뭇잎은 떨어져서도 단풍빛을 잃지 않았다. 숲 그늘 아래 수북이 쌓인 단풍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아무도 가지 않은 하얀 눈밭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걷는 마음이었다. 낙엽 쌓인 길은 실제보다 더 깊게 가을을 마음에 새겼다. 비끼는 햇살에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사람 사는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독산자연공원은 다음날 찾아야 했다. 어제 마지막 발걸음이 닿았던 선우공원 입구부터 걷기 시작했다. 문성로16다길로 접어들었다. 가로수가 도로와 데크길을 나누고 있었다. 데크길로 걸었다. 도로로 끊긴 숲을 잇는 다리가 보였다. 선우공원과 독산자연공원의 숲을 잇는 다리다.

다리 아래를 지나 금천체육공원 숲으로 들어갔다. 단풍물이 제법 들었다. 금천정에 올라 단풍숲을 굽어보았다. 감로천 생태공원 생태연못 단풍숲에서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들이 햇볕에 반짝인다. 바람 따라 낭창거리는 가는 가지가 머릿결 같다. 두 공원과 함께 독산자연공원을 이루고 있는 만수천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쑥부쟁이 피어난 숲길을 걸어 만수천공원 생태연못에 도착했다. 이곳 또한 단풍으로 물들어간다. 햇볕 가득한 연못 단풍숲을 벗어난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시였다.

큰길로 나가는 좁은 길 담벼락에 시를 적어 놓은 액자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살구평생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고 익힌 어르신들의 시와 독산자연공원 숲 아래 있는 영남초등학교 학생들이 쓴 시다. 그곳의 모든 시가 가슴을 울렸다. 그중 손자 생일에 밥 같이 먹고 놀다가 왔는데 손자 생각이 자꾸만 나서 또 보고 싶다는 한 어르신의 시도 있었다.

기역니은부터 배워서 하나의 글자를 완성하고 싶었던 어르신의 마음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보고 싶은 손자 얼굴이었다. 푸르렀던 청춘의 봄, 들끓었던 진초록의 여름을 지나,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아냈다며 돌아보는 단풍 물든 가을은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깊어가고 있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