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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지능 청년들과 함께 만드는 3천원짜리 ‘희망 김치찌개’

5번째 ‘청년밥상문간’ 대학로 슬로우점 열어, 4월부터 정식 운영
경계선 지능 청년, 10주 교육·실습 참여 뒤 6명 정식직원으로 일해

등록 : 2024-03-28 14:28
“느리고 서툴러도 괜찮아요” 이용자들 응원이 큰 힘 돼

‘봉사기회조차 없어’ 부모들 고충 듣고

동대문사회복지관과 협약 맺어 추진

“사회적 인식 확산에 보탬 되고 싶어”

‘청년밥상문간’은 이문수 신부가 힘든 청년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해 만든 식당이다. 3천원짜리 김치찌개와 공깃밥을 양껏 먹을 수 있다. 2017년 정릉점을 시작으로 이화여대점, 낙성대점, 제주점에 이어 다섯 번째로 슬로우점(대학로점)을 열었다. 슬로우점은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경계선 지능 청년의 상생 일터로 4월1일부터 정식 운영한다. 청년들은 10주의 실습과 직무 경험을 거쳐 정식 직원으로 일한다. 실습생 조유지씨가 조리실에서 만든 김치찌개를 내놓고 있다.

‘청년밥상문간’은 3천원짜리 김치찌개와 공깃밥 무한리필로 누구든 부담 없이 식사할 수 있게 운영하는 식당이다. 특히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곳이다. 이문수 신부(가톨릭 글라렛선교수도회 소속)가 2017년 성북구 정릉점을 시작으로 이화여대점, 낙성대점, 제주점을 잇달아 열었다. 그사이 청년문간사회적협동조합 설립도 했다. 입소문과 <유 퀴즈 온 더 블럭>(tvN) 출연 등으로 꽤 널리 알려지면서 후원자가 2500명에 이른다.

29일 오늘 다섯 번째 식당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대학로점)’ 개소식이 열린다. 슬로우점은 경계선 지능 청년들이 일하는 ‘상생일터’이다. 4월1일 정식 영업을 앞두고 시범 운영을 하고 있다. 슬로우점은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와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보이는 흰색 건물의 영(0)층에 자리했다. 2층 단독주택을 개조한 상가건물로, 식당은 길거리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입구엔 ‘유퀴즈 맛집, 청년밥상문간’이라고 쓰인 노란색 세움 간판이 있다. ‘#슬로우점, #혜화맛집, #김치찌개’ 해시태그도 달렸다.

느린 학습자라고도 불리는 경계선 지능인은 지적장애(지능지수 70 이하)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평균 지능에 미치지 못하는 인지능력(지능지수 71~84)을 가진 이들이다. 지능지수 정규분포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13.6%(700만 명)로 추산된다. 이들은 기억력·언어발달이 부진하고 집중력과 표현 능력이 떨어져 일상생활과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문수 신부는 “공식 통계도 없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공식 용어조차도 정립돼 있지 않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며 “부모들이 봉사할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이들의 고충을 알려줬다”고 했다.


실습생들이 조리실에서 설거지하고 있다.

지난 22일 낮 슬로우점에 들어서자 30여 평 홀의 10여 개 테이블은 거의 다 차 있었다. 손님들은 인근에서 일하는 청년, 중장년 등 다양한 연령대로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봤거나, 지나다가 세움 간판을 보고 이용한다고 한다. 재방문한 이용자도 꽤 있었다. 개점 기념으로 기본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식사 나눔 행사를 27일까지 진행했는데 하루 평균 50명 정도가 이용했다.

“왜 슬로우점이냐고 어떤 손님이 물었어요. 저희가 좀 느리고 서툴 수 있어 붙인 이름이라 했더니 힘내라고 응원해줬어요.”

계산대에서 손님들을 응대하던 실습생 조유지(31)씨가 말했다. 조씨는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프로그램 참여자 20명과 함께 지난 1월부터 두 달 동안 청년밥상문간 정릉점에서 실습 교육을 받았다. 그를 포함한 11명(여자 6명, 남자 5명)이 수료하고, 슬로우점 시범 운영 기간(12~24일)에 2~3명씩 조를 나눠 4차례 일 경험을 했다.

이날 실습생 3명은 각자 역할을 나눠 일했다. 조씨는 테이블 안내와 추가 유료 메뉴를 시킨 손님들의 결제를 도왔다. 나머지 2명은 각각 조리실 보조와 홀 테이블 정리를 했다. 움직임이 다소 느리고 가끔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기는 했지만, 큰 문제 없이 무난하게 해냈다. 이지혜 점장은 “홀 정리와 서빙, 조리 보조 등 관심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가게 도와주고 있다”며 “가능한 한 직접 해보게 한다”고 했다. 처음으로 경계선 지능 청년들과 같이 일하는 그는 “사람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소극적인 점도 있지만, 작은 것에도 감사해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했다.

조유지씨가 계산대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들로 인스타그램 슬로우점 개점 소식을 보고 온 20~30대 여성 4명은 음식 맛 칭찬부터 했다. “맛있고, 자극적이지 않고 간이 딱 맞다”며 “느린 학습자들이 사회 경험을 할 수 있는 의미도 있고, 우리 같은 청년들이 고물가 시대에 부담 없이 식사할 수 있어 자주 이용하려 한다”고 했다.

지인과 함께 두 번째 찾은 중년여성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김치찌개가 맛있다”고 만족해했다. 추가 주문 메뉴를 계산하면서 경계선 지능 청년들이 일하는 것을 알게 됐다는 그는 “느리고 서툴러도 괜찮다”며 “이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더 자주 오고 싶고, (저처럼) 더 많은 사람이 와서 느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슬로우점을 개설하면서 청년문간은 무엇보다 경계선 지능 청년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진행하는 데 중점을 뒀다. 경계선 지능인들은 대체로 불을 무서워한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슬로우점에서는 손님 테이블과 주방에 전기 인덕션을 설치하고 전기 증설 공사도 했다. 집중력이 떨어지기에 손님이 많을 경우를 대비해 시나리오를 짜놓고 상황에 따라 근무 시간이나 손님 수를 조정할 생각이다.

청년문간은 슬로우점을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넓어지는 데 보탬이 되게 운영해나가려 한다. 매장에서 이용자들은 느릴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기다려 달라는 슬로우점 설립 취지문을 볼 수 있다. 장성원 매니저는 “경계선 지능인을 내세우기보다는 이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이뤄질 수 있게 하는 데 중점을 두려 한다”고 했다.

슬로우점 입구.

실제 실습생들은 직원들과 손님들의 친절한 태도와 응원에서 힘을 얻고 있었다. 조유지씨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3년동안 했는데 일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웠단다. 한은지(가명·20)씨는 카페에서 일했는데, 음료 레시피 외우기가 힘들어 한 달 만에 그만뒀다. 두 사람 모두 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여러 차례 실습하며 미리 경험해볼 수 있어 어렵지는 않다고 했다. 이들은 “부족한 게 있는데도 화내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줘 좋다”며 “손님이나 점장님께서 응원하는 말을 들으면 힘이 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직무를 충분히 경험해볼 수 있게 10주 동안 이뤄진 실습 교육과 수련에 대한 참여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열심히 하는 이도 있지만, 무단결근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지혜 슬로우점 점장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보다는 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일할 의지가 있는 수습생 6명은 4월부터 정식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슬로우점 설립은 지난해 1월 경계선 지능 청년의 부모들이 이 신부를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자녀가 겪고 있는 고충을 토로했다. 이 신부는 청년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는 대학로에 들어설 청년밥상문간에서 이들이 일할 수 있도록 추진했다. 오랫동안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부모와 청년들 50여 명을 모아놓고 사업설명회도 열었다. 담당 복지사가 정릉점에서 3일 동안 일하며 실습 교육을 위한 매뉴얼을 직접 만들었다. 점장과 매니저 등 이들과 함께 일할 직원들도 복지관에서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교육을 4시간 받았다.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이 12일부터 27일까지 개점 기념으로 기본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식사 나눔 행사를 진행했다. 사진은 이용자들이 경계선 지능 청년들을 응원하기 위해 써붙인 포스트잇 모습.

청년문간이 7년 동안 멈추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데는 주위의 도움이 컸다. 정기 후원자와 함께 ㈜대상이 매주 400의 김치를, 삼양식품이 매달 600개의 라면 사리를 기부하고 있다. 부정기적으로 쌀, 햄 등이 들어오기도 한다. 매장 수가 늘면서 사무국 직원도 9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한계도 있다.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현재 지점마다 월평균 600만원의 적자가 나고 있다. 후원과 기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안정적인 운영 구조와 직원들 처우 향상의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신부는 “매장 수보다 지속적인 운영이 가장 중요하다”며 “슬로우점 건물 1~2층을 카페로 운영해 수익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인테리어 공사 중인 카페는 4월쯤 문을 열 예정이다. 김대건 카페사업총괄팀장은 “다양한 연령층이 편안하게 쉬면서 맛있는 커피와 빵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매장 수가 더 늘지 않더라도 청년밥상문간의 나비효과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전국에는 비슷한 취지의 김치찌개 식당이 생겨나고 있는데, 모두 문간에서 일정 기간 배우고 나간 이들의 결과물이다. 서울과 지역에서 개신교 목사들이 운영하는 ‘따뜻한밥상’, 광주광역시에서 까리따스수녀회가 주도하는 ‘따순밥집’, 전북 전주시에서 김회인 신부가 이끄는 ‘청년식탁 사잇길’ 등이다. 이 신부는 “같은 취지와 바람으로 한 식구처럼 자주 소통한다”며 “올해는 다 함께 뜻을 모아 공동 사업도 모색해볼 계획이다”라고 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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