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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도리 만세시위 아시나요?…마차꾼 등 노동자 주도 1500명 참가

3·1운동 백주년 기획 연재 ② 97년 만에 발굴된 성동구 ‘뚝섬 만세운동’

등록 : 2019-02-28 16:01 수정 : 2019-03-08 14:26
1919년 3월26일 경성 외곽서 일어난 최대 만세운동

300명 헌병주재소 포위…100여 명 체포·12명 복역

2월26일 오후 뚝섬 3·1운동 유적지인 성수동성당(옛 면사무소 터)에서 ‘뚝섬 3·26 만세운동’을 발굴한 성동역사문화연구회 최창준 회장이 성수동 옛 지도를 펼쳐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1919년 3월26일 저녁,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이 몰려가 일제에 부역한 면서기를 응징하는 등 만세시위를 했던 곳이다.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살아남아 3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옛터를 굽어보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마차꾼 김완수(31), 소달구지꾼 김일남(28), 노동자 최자근동(26), 짐차꾼 염명석(36)…. 수감카드 속 이름을 나열해본다. 1919년 3월26일 뚝섬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현장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참여했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일제 경찰에 구속된 이들이다. 지난 2월20일 오후, 이들의 흔적을 쫓아간 성동구 뚝섬 주변은 황량하기만 했다. 성동역사문화연구회 최창준(64) 회장과 100년 전 노동자들이 부르짖은 만세 함성을 따라 거리를 누볐다.

1919년 3월26일, 뚝섬 노동자들의 만세 행진

“1919년 3월26일 뚝도리 만세시위는 고양군 최대 만세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고양군은 사대문 바깥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어요. 현재 서대문, 마포, 은평, 도봉, 동대문, 중랑, 잠실 지역까지 모두 고양군에 속했는데, 고양군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 현재 성동구 뚝섬 지역이었던 겁니다.”

1919년 당시 고양군은 한지면과 뚝도면 외 몇 개 면으로 나뉘었다. 지금의 성수동 지역은 뚝도면에서도 가장 번화한 중심가였다.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수운이 통하는 길목인 덕에 마을에는 술장수와 밥장수, 숙박업소 등이 즐비했다. 면사무소, 우편국, 금융조합, 헌병주재소, 순사주재소 등도 이곳에 있었다. 1919년 3월26일 저녁,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시작한 만세 행렬이 1500여 명 가까이 불어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 가운데 300여 명은 총칼을 들이대는 헌병주재소를 포위해 맞서 싸웠고, 끝내 100여 명이 연행됐으며, 주동자로 지목된 12명의 마을 주민이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했다.


3월26일 만세운동 시위대가 지나간 길을 차분히 따라가는 동안 최 회장은 “돌아볼수록 기가 막히고 흥미진진하다”며 말을 이었다.

“옛 지도와 판결문을 보고 이들의 동선과 흔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 참 감탄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종로구 태화관과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종교인과 학생들이 주도한 3·1운동에 주목하지만, 만세운동은 전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국적 시위 아니었습니까. 뚝섬 쪽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은 ‘노동자’들이 주도했는데, 그때 뚝섬에 살던 이들의 직업군이 만세시위로 연행된 이들의 직업군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놀라웠던 거지요. 말 그대로 아침에 밥 먹고 일하러 나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우리와 같은 민중들의 독립운동 현장이니까요. 저는 1919년 마을 속으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 들었어요.”

뚝섬은 조선 시대부터 1960년대 말까지 대대로 서울의 땔감과 채소를 공급해온 역사가 있다. 강원도 삼림지대 등에서 땔감을 싣고 온 뗏목이 뚝섬 나루터에 도착하면, 노동자들은 하역하고 지게와 달구지로 한양, 또는 경성 시가지로 땔감을 옮겼다. 뚝섬 하역꾼들과 지게꾼들, 우마차가 바쁘게 지나다녀 ‘신작로’로 대우받던 길은 이제 오토바이와 화물차가 간간이 지나는 한적한 길로 변했다. 1919년 3월26일 뚝섬 만세 행진은 그 길의 끝, ‘이뭇개’에서 시작됐다.

“뚝섬 고지도 발굴이 큰 계기…
주민들 발품 팔아 동네 역사 조명”

뚝섬 만세운동 발굴에 앞장선 최창준 성동역사문화연구회 회장

‘노동자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의 거점’

뚝섬 조명한 첫 번째 시도

마을 독립운동가 재조명·그 후손 찾아

‘서울시 우리마을 지원사업’ 공모

2016년 11월 <뚝섬삼일운동> 자료집

“뚝도 청년동포형제들아” 벽보 속 흔적을 따라서

“뚝도 청년동포형제들아. 근일 삼천리강산 13도 중 2천만 동포가 모두 소동을 하는데, 왜 그런지 뚝도 청년들은 한마디 하지 않는가?” “대한독립이 되었네. 여러분도 만세를 부르시오.” “우물 앞으로 모여서 만세를 부르되 시간은 오후 7시 30분쯤 되어 부르라.”

1919년 3월23일 뚝섬 여기저기에도 벽보가붙는다. 3월26일의 만세운동을 도모하는 가지각색 문구가 마을 주민과 노동자들을 움직였다. 현 서울숲지구대 앞으로 뻗은 큰길을 따라가면, 길 끝에 무심하게 놓인 바윗돌 4개가 보인다. ‘이뭇개’라 기록된 뚝섬 만세운동의 거점이다.

“판결문 진술을 보면, ‘이문동’과 ‘야소교회’, ‘서뚝도리 밥집’ 앞에서 시위꾼들이 만나 만세 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이문동’을 추적하다가 이 바윗돌을 처음 발견했어요. 성수동에 ‘이문동’이란 지명은 없는데, 당시엔 마을로 들어가는 문을 대체로 ‘이문’이라 했답니다. 기억력이 비상한 한 마을 주민이 말씀하시길, 이 바위 4개가 옛 문기둥을 받치던 돌이라는 거예요. 문이 있던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지요. 우리말로 ‘이뭇개’라 했답니다.”

옛 지도 속 ‘야소교회’는 현 성수동교회와 터가 들어맞았다. 1906년 작은 한옥으로 지은 성수동교회는 여러 번 중축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윽고 만세 행렬은 이뭇개와 야소교회를 지나 다시 ‘순사주재소’ 앞을 지나는데, 지금의 서울숲지구대 위치와 똑같다. 최 회장은 “한자리에 대대로 경찰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며, 다시 길을 틀어 지구대 왼쪽 길을 따라 직진했다. 당시 관가가 늘어섰던 길이다. 우체국 터와 관사, 금융기관 터, 면사무소(현 성수동 성당)터도 길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벽보로 퍼져나간 3·26 만세운동 약속 장소 ‘우물 앞’은 현재 일반상점가인 ‘우리눈 안경’ 부근 삼거리로 짐작됐다. 성수동 성당 앞에서 최 회장은 “자료가 많이 없어 아쉬웠다”며 다시 옛 지도를 펼쳐 보였다.

“만세운동 당시 마을 사람들이 여기 면사무소로 몰려와 면서기부터 팼답니다. (웃음)면장은 마침 자리를 비워, 면장이 살던 집으로 가서 돌을 던져 항의하고요. 그 내용도 판결문과 신문 기사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동네 유적은 “박제가 아닌 살아 있는 이웃 역사”

최 회장이 성동구 지역 노동자들의 3·1운동 흔적을 정리한 건 ‘우연’에서 시작한 일이라 한다. 고향이 동작구지만, 젊은 시절부터 성동구에서 직장생활과 야학 활동, 노동운동을 번갈아 하면서 동네에 정을 붙여왔다. 2014년 뜻 맞는 지인들과 ‘성동역사문화연구회’를 결성해 자료집 <뚝섬나루길 한강에서 도성까지>를 만들다가 ‘3·1운동 마을 유적지’까지 발을 들였다.

“국토지리정보원 등에서 1910년대 ‘성동구고지도’를 발견한 일이 계기가 됐어요. 돋보기 놓고 비교하는데, 옛길과 건물터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겁니다. 한발 더 들어가니 일제강점기 흔적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동네에 생존해 계시고,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증언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회원들과 3·1운동 마을 유적답사까지 이어간 거예요.”

틈틈이 발품을 팔아 ‘서울시 우리마을 지원사업’ 공모로 2016년 11월 <뚝섬삼일운동>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는 성동구 뚝섬 지역을 ‘노동자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의 거점’으로 조명한 첫 번째 시도다.

최 회장은 “뚝섬 만세운동에 파고들수록 이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내 이웃의 역사, 살아 있는 역사임을 배웠다”고 한다. “성동문화역사연구회 회원들 모두 생업이 따로 있어 작업도 더디고 힘들었지만, 어르신들과 한 면담이 재밌어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동시에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했죠. 어르신들을 더 일찍 만났다면, 더 많은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 애써 수소문해서 찾아가면 이미 기력이 다하시거나 돌아가신 경우가 많았어요. 이 점은 아직도 아쉽습니다.”

마을 독립유공자들을 재조명하고 후손들을 찾아 기록한 것 역시 자료집의 성과다. 최회장은 뚝섬 만세운동과 관련해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염명석, 문창호, 조병직 선생에 대한 기록을 따로 정리하며, 그 가운데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염명석 선생의 외손자 김득환씨와 조병직 선생의 장손 조용휘(76)씨를 만나 ‘후손의 생애’와 사진 자료까지 일부 정리해 넣었다.

조병직 선생 후손 조용휘씨.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오히려 어렵게 산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제가 만난 두 분 모두 선대의 유품을 간직하고 계시진 못했어요. 생전에도 집안에서 선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병직 선생의 경우 독립운동 후에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지내셨다고 하고요. 후손들과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점도 기억에 많이 남죠.”

조용휘씨는 지난 2월26일 <서울&>과 한 통화에서 “겪지 않고는 모를 난감한 시절의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뚝섬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시다가 1919년 3월 만세운동에 참여해, 조선인 보조헌병의 밀고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 붙잡혀가셨다. 평생 전기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아야 한다’고 손주인 나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다. 뒤늦게라도 독립유공자로 빛을 보게 되어 고맙고 천만다행이다”고 했다.

“우리 집은 ‘산 사람들의 초상집’이었어요. 할아버지는 뚝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년 혹독하게 옥살이를 하셨답니다. 전기고문 후유증과 구타로 관절이 나가고, 1965년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하셨어요. 스스로 ‘고문엔 약도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게 고문받던 얘기를 할 때면 언제나 주위를 살피며 숨어서 말씀하시곤 했죠. 하늘에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지나가면 ‘히코키 떴다!’고 외치며 이불 속에서 고통스러워하시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시고. 제가 제대하고 장례식을 치렀는데 아직도 그 안타까움이 남아 있습니다.”

동네 유적 발굴은 민과 관이 함께 해야 할 일

최 회장은 ‘동네 유적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은 민간과 지자체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성동구뿐만 아니라 동네마다 삼일운동 유적지가 숨어 있을 겁니다. 문화유산이 사라지기 전에, 각 동네 유적을 발굴해 기록하는 일이 지금쯤 필요해 보여요. 세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거든요. 우리 선조가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피 흘리며 싸워왔습니까. 생생한 동네 역사는 그 자체로 후대에게 교육 효과도 있을 겁니다.”

뚝섬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완수 선생 수감카드 성동문화역사연구회 제공.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확한 역사 고증과 실증을 거쳐 마을유적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알림판을 설치하는 등, 주민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할 수 있는 동네 유적 보존 방법과 기림 사업 등을 논의하고 등 3·1운동 유적을 기념하는 방안을 검토하려 한다”며 “오는 3월1일 왕십리광장에서도 주민 주도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00년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고 했다.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