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국회 계류된 법안 1만 개 ‘독파’한 청년들

등록 : 2019-03-14 15:59
서울시NPO지원센터 비영리 스타트업 1기 서강대생 ‘투정’

‘법안 쇼핑몰’로 의원에 청원 편지…입법 공론화 광고 정류장에 게재

2월20일 서강대 동문회관 ‘에스지엠 랩’(SGM Lab)에서 ‘투정’ 김예인(오른쪽) 대표와 임동진씨가 지금까지 제작한 굿즈(기념품)를 들고 있다. 팀원 박진영(25)씨는 인턴으로 일하고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2017년 서울시와 서울시엔피오(NPO)지원센터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비영리 스타트업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새로운 공익 활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비영리 스타트업에 주목해, 이들의 출현과 성장을 지원한 것이다.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일반 스타트업과 달리 비영리 스타트업은 공익 활동을 목표로, 기존 비영리단체와는 차별화된 창의적 아이디어와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게 특징이다.

14 :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정한 1기 5개 팀 가운데 ‘투정’은 서강대 재학생 3명으로 구성된 최연소 팀이었다. 당시 경영학과 2학년이었던 김예인(22) 투정 대표는 “1기에 뽑힌 다른 팀들은 이미 활동을 시작한 상태였는데, 저희는 초기 아이디어만 가진, 말 그대로 ‘스타트업’ 상태였음에도 운이 좋게 붙은 거 같다”고 말했다. “촛불집회로 정치에 관한 관심이 절정일 때였어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노랫말로 익숙해졌지만, 국회의원들의 입법 활동에 관한 정보는 찾기 어려웠어요. 활동하던 서강대 프로그래밍 동아리 ‘멋쟁이 사자처럼’에 ‘쉽고 재미있는 게임으로 정치에 대한 청년의 관심을 높이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관심 있는 학생들이 모였어요.”

처음에는 다마고치 게임처럼 각 법안에 대해 찬성/반대를 눌러 국회의원을 키우는 게임을 만들려고 했다. 문제는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 캐릭터를 그리는 데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이었다. 고민한 끝에 인터넷 쇼핑에 몰입하는 또래에 착안해 법안을 상품처럼 파는 쇼핑몰로 방향을 돌렸다. 쇼핑몰에서 법안을 사면 기념품(굿즈)을 받을 수 있고, 국회의원들에게 심사를 촉구하는 청원 메일이 자동으로 전달된다. 펀딩한 금액으로는 입법을 공론화하는 광고를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에 하기로 했다.

쇼핑몰에 상품으로 올릴 법안을 추리기 위해 20대 국회에 계류된 법안들을 속속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지난해 2월 팀원들이 1만 개의 법안을 모두 읽고 정리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반발하는 팀원도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정치나 법을 전공하지 않은 우리가 국회와 법을 이해하게 됐고, 소개하고 싶은 멋진 법안을 한가득 쟁여놓을 수 있었거든요.”


데이트폭력 피해자 보호법

투정의 데이트폭력법 홍보 동영상에 출연한 신보라 자유한국당 의원(왼쪽),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난해 5월 처음으로 데이트폭력법에 대한 카드뉴스를 만들어 관심 있을 만한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때 데이트폭력 관련 법안을 발의한 신보라 자유한국당 의원이 페이스북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바로 연락해 만난 뒤 비슷한 법안을 발의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연락해 “홍보 동영상에 신보라 의원님도 나오기로 하셨다”며 출연 승낙을 받아냈다. “바쁘신 분들이라 아침 8시쯤 만나 1시간 30분 정도 찍었는데, 처음 겪는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던 거 같아요. 촬영 도중 삼각대가 넘어가는 바람에 아빠의 디지털(DSLR)카메라가 부서져 수리비가 60만원 정도 나왔어요. 다시는 카메라를 빌리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네요.”

이렇게 제작한 동영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수십만 명의 구독자(팔로어)를 보유한 인플루언서(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퍼나르는 날에는 하루에 200만원씩 펀딩되기도 했다. 목표였던 1천만원 펀딩에 성공한 기쁨도 잠시, 상품 500개를 포장하고 배송하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류 시스템을 조금도 모를 때라 전문업체에 맡기는 비용이 아까워 3명이 직접 포장과 배송을 시작했다. 15시간이 걸린 작업을 끝낸 뒤 아웃소싱을 해도 돈이 아깝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펀딩한 금액으로 강남역에서 가장 큰 광고판에 7월 한 달 동안 광고했어요. 첫 광고라 저희 인건비를 줄이고 광고비에 쏟아부었습니다. 그 광고가 크게 보도되면서 이슈가 됐고, 1년째 심사가 지연되던 법안에 대한 공청회가 두 달 뒤 열렸으니 큰 효과를 본 셈이죠.”

아내 두개골 부순 가정폭력 사태…혜화역 버스정류장 광고로 이슈 부각

음식물 쓰레기 관련 법안 개정 운동에

배우 김재경씨 참여해 큰 호응

“인터넷 통해 많은 정보 제공할 경우

청년들도 정치에 관심 가질 것”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법

1차 펀딩에 참가한 400여 명에게 한 설문조사에서 다음 주제로 가정폭력법을 다루자는 의견이 많았다. “가정폭력법을 준비하면서 피해 사례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아내의 두개골을 때려 중상을 입힌 남편이 유일한 보호자라는 이유로 구속되지 않았고, 2개월 뒤 결국 아내를 죽인 사건도 있었어요. 피해자가 신고해도 정부에서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은 사례가 정말 많았어요. 그런 사람인지 모르고 결혼했다가 재수 없으면 저도 죽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끔찍했죠.” 펀딩 자체는 잘 안됐지만 혜화역 버스 정류장에 붙인 “아내의 두개골을 부서져라 때린 남편이 유일한 보호자라는 이유로 구속되지 않았다”라는 광고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지금도 가정폭력이 이슈가 되면 그 광고 문구를 찍은 사진이 다시 올라오곤 한다.

음식물류 폐기물관리법

세 번째 법안부터는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처음에는 프로젝트 하나 진행하는 데 몇 달씩 걸렸지만, 이제 2주면 제작할 수 있게 됐다. “지인 소개로 유기견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배우 김재경씨를 만나게 됐어요. 동영상 출연만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주제 선정부터 디자인까지 참여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하셨어요. 알고보니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셨더라고요.”

배우 김재경씨는 직접 디자인한 굿즈 사진을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올렸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눈 끝에 폐기물관리법을 골랐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업자의 90%가 개농장 주인으로, 수거한 음식물 쓰레기를 아무런 가공없이 개들에게 먹이고 있다. 이런 동물 학대를 방치하는 폐기물관리법을 개정하자는 내용이다. “연예인이 정치적 사안에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도 김재경씨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여러 번 홍보해주신 덕분에 한정 수량으로 제작한 리드줄과 텀블러가 완판될 수 있었어요.”

퇴근 뒤 연락금지법

투정에서 판 모든 법안이 성공한 건 아니다. 퇴근한 직장인에게 상사가 연락하면 근무시간으로 간주해 수당을 제공하자는 법안은 반응이 저조했다. 실패 원인을 분석해보니 펀딩 참여자의 70%가 25살 이하라 직장인이 많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슷한 정치 참여 사이트 가운데 투정의 참가자 연령층이 가장 낮다. 처음에는 2030세대를 주 타깃층으로 삼았는데 막상 반응을 보인 건 1020세대였다.

“처음 쇼핑몰을 기획할 때 10대는 생각도 안 했는데 설문조사해보면 의외로 10대가 많았어요. 10대들도 당연히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펀딩에 참여하지만, 그 보상으로 예쁜 디자인의 굿즈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갖고 다니는 굿즈를 본 친구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고 설명한 뒤 ‘같이 사자’고 말해도 우리 디자인이 예뻐서 미안하지가 않다더라고요.”

온라인 게임 성희롱 처벌법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알리기 위해 ‘투정’ 동영상에 출연했다.

지난해 말에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20대 국회 최연소 의원인 김수민(33) 바른미래당 의원이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행위를 처벌하는 성폭력범죄법 개정안을 알리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보통 국회의원을 만날 때 저희가 여의도로 갔는데, 그분은 서강대로 찾아오셨어요. 시간이 안 맞아서 밤 9시에 만났는데 보좌관도 없이 혼자 오신 걸 보고 법안에 대한 열정이 있으시구나 싶었죠. 영상 찍는 것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셔서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온라인 게임을 하는 여성이 성희롱을 당하는 사례를 담은 홍보 영상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대 국회에 30대 국회의원이 두 분밖에 안 계셔서 그런지 청년의 관심사나 문제를 담은 법안이 국회에서 큰 관심을 못 받는 것 같아요. 그런 법안 가운데 오랫동안 계류돼 있거나 상정조차 안 된 걸 주로 고르고 있습니다.”

투정 사이트(tojung.me)의 월 방문자 수는 1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페이스북 구독자도 1만 명에 다가서고 있다. 팀원 3명 모두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며 일군 성과다.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졸업까지 1년 가까이 남은 상황이라 계속 미뤄지는 게 많다. 사이트 개발과 운영을 담당하는 임동진(22)씨는 “국회의 의안정보시스템은 제목 검색만 가능해서 시민들이 이용하기 굉장히 불편하다. 본문까지 검색할 수 있도록 따로 시스템을 만들어 팀원끼리 이용하고 있는데, 일반인도 쉽게 설치해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저분한 부분을 잘 다듬어 공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이트 개발을 담당하는 박진영(25)씨는 인턴까지 하느라 평일 밤과 주말을 이용해 업무를 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건 기성세대들의 시각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거의 모든 소통을 인터넷에서 하는 저희가 익숙한 방식으로는 정치인들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잖아요. 가령 할아버지 할머니께 모든 정보를 인터넷으로만 전달한다면 정치에 대해 그분들이 모르실 수밖에 없겠죠. 청년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한다면 분명 청년도 정치에 관심과 반응을 보일 겁니다.”(김예인 투정 대표)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