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상 꽃송이에선 천년 전 석공의 온기 느껴져

서울의 작은 박물관 ㉓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

등록 : 2020-03-05 14:47
신라·고려 시대 만들어진 석탑들 즐비

모진 풍파 겪은 사람들의 기원 담은듯

미륵불-여래불, 서로 인사하듯 서있고

조선 왕가 탯줄항아리 전시는 이색적

1천 년 전 석공의 정과 망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 땀 한 땀 돌을 쪼아 만든 점과 선이 모여 연꽃이 되고 구름이 되고 용이 된다. 미륵부처의 손에 들린 꽃으로 피어난 돌이 사람들 마음을 달래고, 약사여래 손에 들린 약그릇은 사람들 병을 낫게 하려는 염원이다. 돌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즐비한 옛 석물에서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다.

석조물 정원


석조물 정원의 석물들. 사진 왼쪽에 보이는 탑이 국보 100호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정원’에 있는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된 옛 석물들을 보며 걷는다.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발해의 남북조시대,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세월 동안 나라가 바뀌고 왕조가 바뀌었지만 그 땅에 살던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천 년도 넘는 세월 동안 모진 풍파를 견디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이 서린 옛 석물이 삶의 이정표처럼 서 있다.

‘석조물 정원’ 초입. 국보 100호인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늘로 솟은 수직의 돌탑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문화재청 자료에 1915년 탑의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경복궁으로 옮겼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 충렬왕 9년(1283년)에 제작한 두루마리 7개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됐다고 나와 있다. 그때 탑을 중수했으며 탑이 처음 세워진 때는 고려 중기 이전이라 추정하고 있다. 쪽물 들인 종이에 은물로 글씨를 쓴 경전을 만든 천 년 전 누군가의 마음을 웅건한 기상의 칠층석탑이 품고 있었다.

발길을 옮겨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앞에 섰다. 경상북도 김천시 갈항사 터에 있던 석탑으로 국보 99호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년)에 건립했다.

보물 166호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과 보물 282호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은 풀밭 오솔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은 높이가 243㎝다. 웅크린 사자 두 마리가 석등을 받치고 있다. 그 위에 구름 문양의 받침돌과 용 문양을 새긴 받침돌이 보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창이 네 개다. 석등의 규모와 문양을 새긴 기법이 예사롭지 않다. 고달사가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음을 짐작해본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창건돼 고려 원종 1년(1260년) 지금의 사찰 터 규모로 확장됐다. 고달사는 당대 3대 사찰 중 하나로 알려졌다.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 터에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4호) 등 여러 석물이 남아 있다. 홍제동 오층석탑은 사현사 터에 있던 고려시대 탑이다.

진짜 보신각종을 만나다

강원도 원주시 천수사 터에 있던 오층석탑과 삼층석탑을 지나면 보물 358호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을 만나게 된다. 보제존자 나옹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신륵사에도 그의 사리탑이 있다. 제자들이 고려 우왕 14년(1388년) 영전사에도 사리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경기도 이천시 안흥사 터에 있던 고려시대 초기의 안흥사 오층석탑을 마지막으로 ‘석조물 정원’ 산책을 마치고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석조물 정원의 석물들. 사진 왼쪽에 보이는 탑이 국보 100호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이다.

석조물 정원 바로 옆 작은 숲에 고려시대 초기의 부처상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큰 광배를 두른 부처상은 손에 꽃을 든 모습이다. 미래에 나타나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이다. 그 옆 부처상은 손에 약그릇으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 있다. 사람들 병을 낫게 한다는 약사여래다. 삶의 격랑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기원이 서려 있는 두 부처상을 지나면 날아갈 듯 깃을 펼친 형상의 기와지붕이 보인다. 그곳에 조선시대 만들어진 진짜 보신각종이 있다.

조선시대 보신각종이 있는 종각.

옛 보신각 동종(보물 2호)으로 불리는 이 종은 조선 세조 14년(1468년) 만들어졌다. 원래는 정릉사에 있었는데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현재 탑골공원 자리)로 옮겨졌다. 광해군 11년(1619년) 현재 종로 네거리에 종각을 짓고 종을 걸었다. 오전 4시에 33번(파루), 오후 10시에 28번(인정) 종을 울려 도성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다고 한다. 조선 말기 민요 경복궁 타령 노랫말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이 밝아온다’에 ‘파루’라는 말이 나온다. 고종 32년(1895년) 종각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리게 됐다. 1985년까지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했다.

보신각종을 한 바퀴 돌며 파루를 쳐 새벽을 열고, 인정을 치며 도성 문을 닫았던 시절 사람 사는 마을에 퍼졌던 종소리를 상상해본다. 한양도성 안팎의 너른 벌판에 펼쳐진 초가와 기와집이 만들어낸 풍경 위로 널리 퍼지는 종소리, 사람들은 그 종소리에 맞춰 새날을 열고 하루를 마감했을 것이다.

줄지어 선 국보와 보물들

(왼쪽)조선시대 보신각종. (오른쪽)현화사 석등.

보신각종 옆 금강송 오솔길을 걸으며 조선시대 무덤 앞을 밝혔던 석등인 장명등과 무덤을 지키던 석양, 문인석을 본다. 그 사이에 자리잡은 태실석함은 태항아리를 보관하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가에서는 자손이 태어나면 아기의 태(탯줄과 태반)를 항아리에 넣어 안치하는 태실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다.

전시관 건물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석물들이 줄지어 있다. 황해도 장풍 현화사에 있던 현화사 석등의 크기와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현화사는 고려시대 현종 임금(재위 1009~1031년)이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보물 제190호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묘탑은 강원도 원주시 현계산 기슭 거돈사에 있던 부도다. 거돈사는 신라 후기인 9세기께 지어진 절이다. 현재 거돈사 터에는 보물 750호 삼층석탑과 보물 78호 원공국사승묘탑비가 있다.

보물 359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와 국보 102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이 나란히 서 있다. 정토사는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개천산에 있었던 절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국사로 예우했던 법경대사가 주지였다. 홍법국사가 법경대사 뒤를 이었다.

보물 365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과 석관은 강원도 원주시 흥법사 터에 있던 석물이다. 탑은 고려 태조 왕건의 왕사를 지낸 진공대사 충담의 묘탑이다. 탑 옆 돌로 만든 함은 불교경전과 유물을 담았던 것이다.

머릿돌에 새겨진 구름과 용의 조각이 인상적인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는 보물 361호다. 보물 362호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을 보고 마지막으로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앞에 섰다.

염거화상탑에 새겨진 사천왕상.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탑은 강원도 흥법사 터에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이름 앞에 전한다는 뜻의 ‘전’(傳) 자를 붙였다고 한다. 국보 104호인 이 탑은 신라 문성왕 6년(844년)에 세웠다. 사리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탑의 양식을 따랐다.

염거화상탑에 새겨진 사천왕상에 늦은 오후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햇살이 비친다. 점심 먹고 시작한 산책, 아주 오래 전 석물들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