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미로길 ‘뚜벅뚜벅’…코로나 미로 출구를 찾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⑥ 성공한 도시재생의 모범 연남동

등록 : 2020-03-12 14:28
출구 없는 미로인 듯 막막한 현실에

튀는 카페 찾아서 경의선 숲길 방문

순발력 만점 ‘놀다가게 ㅋㅋ’ 등 지나면

동진시장 뒤쪽 미로 골목 나타나지만

참을성 있는 걸음에 미로도 끝 드러내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서 길이 사라졌다. 믿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다. 괴물 같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이 가져온 현상이다. 출구로 나가는 길이 어디인지, 마치 미로처럼 막막하게 느껴진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한 권의 책에 눈길이 꽂혔다. 자크 아탈리의 <미로-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벌써 20여 년 전에 사서 읽었던 책인데 그때는 보이지 않던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미로에 담겨 있는 고대의 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 이성과 속도를 예찬하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길을 잃고 헤매게 될 위험성이 높다. 반대로 참을성 있게 미로의 비밀을 다시 찾아내는 사람들, 미로가 제시하는 가르침을 따르며 그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사람들은 미래의 숲을 무사히 통과할 것이다.”

그의 말처럼 오랫동안 나는 ‘인생 직진’의 삶에 익숙해 있었다. 분명한 목표 설정과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최대한 가까운 길을 선택해야 하며 효율성은 언제나 최고의 덕목이었다. 길을 잃고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과 돈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제 직선의 길이 아닌 미로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의 미로는 도시의 오래된 골목길 안에 있다. 연남동 골목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다 ‘연남동 미로길’도 있다.

지하철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오면 곧바로 경의선 숲길이다. 이곳에서 홍제천까지 1.3㎞에 이르는 시원한 녹지공간을 이곳 사람들은 뉴욕 센트럴파크에 빗대 ‘연트럴파크’라 부른다. 기차가 다니던 철로 주변에 나무를 심고 산책공원으로 바꾸어 서울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리고 성공한 도시재생 사업 가운데 하나다. 15년 전 이 동네에 출판사 사옥을 마련한 김성실 ‘시대의 창’ 대표를 만나 연남동의 매력이 뭔지 물었다.

“일단 접근성이 좋아서 책을 쓰는 저자들이 와보고 싶어 하는 동네입니다. 작지만 개성 있고 가성비가 훌륭한 음식점과 술집이 많기에 회의를 끝내고 함께 어울리기에도 좋습니다. 작업하다 피곤하면 산책하기에도 참 좋지요. 출판을 위한 인쇄소나 제작소가 가까운 데 있고, 디자인 사무실들이 인근 홍대 근처에 몰려 있어서 출판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습니다. 다만 임대료가 너무 올라서 사옥을 갖지 않은 출판사로서는 부담스러울 겁니다.”

대왕꼼장어·레게치킨

출판을 비롯한 콘텐츠 관련 일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하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연남동은 지식 생태계가 잘 구축된 곳임이 틀림없다. 홍대 앞이 젊은이들의 구역이라면 연남동은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다. 홍대입구역에서 경의선 숲길을 바라보고 우측 동네로 향하기로 한다. 입구 철길 옆의 ‘대왕꼼장어’ ‘레게치킨’ 같은 간판 뒤로 미로와 같은 골목길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우선은 경의선철길을 따라 걷는 게 이 동네에 대한 예의다.

‘술길 싫어요, 숲길 좋아요!’

곳곳에 걸려 있는 안내문처럼 늦은 밤까지 술판이 벌어져 지역주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지만, 뒤집어보면 박제화되어 활기를 잃은 곳이 아니라 활어처럼 톡톡 튀는 분위기가 지배하는 동네라는 뜻도 된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동네 사람들, 구경 나온 외국 여성들이 제법 눈에 많이 뜨인다. ‘놀다가게 ㅋㅋ’와 같은 간판처럼 이곳은 확실히 밝고 가볍고 순발력이 넘친다.

걷고 나면 허기가 진다. 점심을 위해 성미산로31길의 갤러리를 겸한 이탈리안 음식점 ‘잇다프로젝트’로 향했다. 라자냐와 브라타치즈 샐러드가 일품인데, 코키지 값(레스토랑에 와인을 가져갔을 때 내는 돈)을 받지 않는다는 말에 가져간 와인으로 가볍게 한잔 즐길 수 있다.

식사 후 본격적인 연남동 골목길 투어다. 근처에 있는 ‘사이에’ 책방을 지나 성미산로28길로 들어서면 ‘연남동 공방길’이다. 애견카페와 잡화점, 칵테일바 등이 모여 있는, 젊은 여성 취향 골목이다.

이제는 커피를 마실 시간, 이 동네 커피 장인이 만드는 ‘바람(Baram)커피’로 향한다. 동교로38길 입구로 들어서면 화려한 벽화부터 예사롭지 않다. 제주대학 부근 한라산 입구에 있던, 같은 이름의 유명 커피점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각기 다른 원두 가운데 몇 가지를 선택해 함께 즐길 수 있는 ‘명품 커피투어’가 특징이다. 커피를 단순히 입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중년의 커피 장인이 숙련된 솜씨로 원두를 꺼내서 갈고 드립한 뒤, 출장지에서 사들여 온 몇 개 안 되는 커피 잔에 담아주기까지의 전 과정을 시각, 청각, 후각, 미각으로 즐긴다. 좋은 동네의 조건으로 커피전문점과 맛집의 존재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이유를 실감하게 되는 곳이다.

이곳을 나오면 이 동네 골목길의 주축인 연희로1길, 이 일대에서 가장 맛있는 마카롱을 만드는 ‘리틀 빅토리’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작가 이상이 좋아했던 다방 이름을 딴 ‘낙랑파라’ 카페, 그리고 작은 노점과 벼룩시장이 곳곳에 보인다. 골목 끝에 있는 ‘연남슈퍼’는 손님이 냉장고에서 직접 맥주를 꺼내서 먹는 일명 ‘가맥집’으로 인기 있다.

동진시장 옆 골목

마침내 동진시장이다. 작고 허름해 보이지만, 경의선숲길과 더불어 연남동의 부활을 알린 양대 축이다. 주말이면 이곳에서는 공방에서 직접 만든 수제품 시장이 열리는데, 시장 안과 밖으로 커피리브레와 카레 음식점과 추로스로 유명한 골목이다. 동진시장 뒤쪽으로 마치 미로처럼 골목길이 얽혀 있는데 ‘연남동 미로길’에 속한다. 마치 보물찾기 게임을 즐기듯 스마트폰을 들고 찾아다니는 것이 이 골목의 매력이다.

송가

연남동 골목길을 제대로 즐기려면 낮이 아닌 저녁때 와야 한다. 마무리는 동진시장 건너 화교가 요리하는 작은 중국음식점 ‘송가’로 간다. 이곳은 ‘샤오츠’(小吃) 전문, 즉 작은 접시에 양을 많지 않게 담아 나오는 곳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즐기기 좋다. 오향장육과 삼겹살가지볶음이 일품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은 회복 탄력성이 강한 곳이다. 잡초보다 더 강한 정신이 살아 있다. 옛사람들이 미로에 남겨놓은 메시지처럼 참을성 있게 뚜벅뚜벅 걸어나가다 보면 머지않아 출구도 나올 것이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