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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동네 맥가이버들 봉사 손길, ‘헌 집을 새집처럼’

등록 : 2020-03-19 15:11 수정 : 2020-03-20 13:44
보문·안암동 주민 40여명 참여하는 집수리봉사단 ‘금우회’

12년째 2~11월 매달 1회 소외이웃 집 고치기 활동 이어와

2월23일 오전 성북구의 집수리 봉사단 ‘금우회’ 회원들이 고려대로에 있는 연립주택 반지하의 거실 겸 부엌에 새 장판을 깔고 있다. 금우회에는 보문동, 안암동 주민 40여 명이 참여해 2008년부터 소외이웃의 집 고치기 활동을 이어왔다. 성북구에는 금우회와 더불어 8곳의 집수리 전문 봉사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2015년부터 구청의 저소득층 집수리 지원사업에 참여하며, 연말에는 간담회를 열어 활동을 공유한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헌 집을 새집으로 만들어주셨네요. 너무 행복해요.”

2월23일 일요일 오전, 박정수(가명·71) 할머니가 소녀처럼 수줍어하며 작은 목소리로 집수리 봉사단원들에게 말했다. 박 할머니가 홀로 사는 성북구 고려대로의 연립주택 반지하에는 깔끔한 새 벽지와 장판이 깔렸다. 찢기고 곰팡이가 폈던 벽지와 장판은 온데간데없었다. 불을 제대로 켤 수 없었던 부엌 전등은 스위치가 생겨 환하게 켜졌다.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10만원으로 싸게 살다보니 집주인에게 고쳐달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해 속 끓였는데 오늘 다 해결됐다”고 말하는 박 할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둠침침한 현관에는 센서등이 달렸고 방과 거실, 화장실 전등도 엘이디(LED) 전등으로 바뀌었다.

이날 박 할머니의 낡은 반지하 집을 새집처럼 만들어 준 ‘두꺼비’는 성북구 집수리 전문 봉사단체 ‘금우회’ 회원들이다. 이들은 2008년부터 12년째 2월에서 11월까지 매달넷째 주 일요일에 모여 소외이웃의 집을 고쳤다. 90여 가구의 낡은 집이 이들의 손길로 말끔해졌다. 현재 봉사단에는 보문동과 안암동 주민 42명이 참여하고 있다.

초기엔 회비(월 3만원)를 쪼개 벽지·장판 등 자재를 직접 사야 했다. 2015년부터 성북구청이 저소득층 주거개선사업으로 재료비를 보태주고 있어 큰 힘이 된다. 자원봉사지원센터와 협조도 이뤄져 일손도 가벼워졌다. 동 주민센터에서 대상 가구를 추천해주고 자원봉사지원센터는 자재 구매를 위한 행정적인 절차를 도와준다.

금우회 회원들은 직업에 따라 집수리 기술 수준도 다양하다. 도배, 장판, 싱크대, 새시, 전기, 조명 등 집수리 기술 ‘베테랑’들에서 자영업자, 공무원, 회사원, 주부 등과 같은 아마추어도 있다. 하지만 베테랑들과 함께 일하다보면 웬만한 집수리는 할 수 있게 된다. 연령대는 40대부터 70대 중반까지 폭넓다.


최연장자인 마권수(75) 고문은 전직 언론인이다. 금우회를 만들 때부터 함께해왔다. 마 고문은 “10년 넘게 꾸준히 정기적으로 봉사해왔다”며 “마음에서 우러나 힘닿는 데까지 참여한다”고 말했다. 최연소자인 최원명(47)씨는 싱크대 설치 기술자다. 지인이 오랫동안 권유해 3년 전부터 참여해 쉬는 날 봉사한다. 최씨는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망설이기도 했는데 그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올해 첫 봉사날인 2월23일엔 금우회 회원 24명이 참여했다. 박청기 회장은 “대개 10여 명 참석하는데 두 달 쉬어 그런지 평소보다 회원이 많이 나왔다”며 “오늘은 두 팀으로 나눠 두 가구 고치기 봉사를 한다”고 했다. 회원들은 2주 전 금요일 저녁에 모여 봉사 계획을 정했는데 코로나19 확산으로 봉사일 전날 회장단이 모여 긴급회의를 했다. “코로나로 집에 더 오래 있어야 하는데 덜 춥고 깨끗한 환경에 계실 수 있게 어르신들과 약속한 대로 하자”며 예정대로 봉사하기로 뜻을 모았다. 대신 마스크와 손세정제를 준비해 바이러스 감염·확산 방지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집수리 봉사단 금우회의 막내이자 ‘보물’인 최원명씨는 싱크대 설치 기술자다. 최씨는 회원 3명과 함께 2월23일 동소문로에 사는 시각장애인 부부의 집에 새 싱크대를 설치했다. 정용일 기자

이날 집수리 봉사를 한 곳은 박정수 할머니 집과 동소문로에 있는 송가영(가명·76) 할아버지 집이다. 송 할아버지와 아내는 둘다 시각장애인이다. 3년 전 이사 온 집 싱크대에서 물이 새고 냄새가 나서 동 주민센터에 집수리 지원 사업을 신청했다. 최원명씨 등 회원 4명이 낡은 싱크대를 뜯어내고 맞춤형으로 짜 온 새 싱크대를 설치했다. 10년째 봉사활동을 해온 신상철 부회장이 “최씨는 봉사단의 싱크대 설치 작업을 도맡아 하고 있어 ‘금우회 보물’로 불린다”고 귀띔해줬다.

최씨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임팩트드라이브로 수납장을 잘라내고 도려내며 모양을 맞춰 싱크대 상부장을 달았다. 후드, 하부장, 수전 설치 등 3시간여 작업을 끝내고 곰팡이가 슬지 않게 실리콘 처리로 꼼꼼하게 마무리했다. 최씨는 “형님들이 함께 도와줘 시간도 덜 걸리고 훨씬 수월했다”고 했다. 곁에서 묵묵히 작업을 도왔던 신희섭씨는 1년 반 정도 참여했는데 그새 도배와 장판 까는 걸 배워 집에서도 활용하고 있다. 신씨는 “봉사하면서 집수리 기술도 익혀 생활에 도움도 되고, 어렵게 사는 이들을 보며 감사할 줄 알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집 고친 어르신 매달 3만원 기부…나눔의 선순환 이뤄내”

40~70대, 자영업·공무원·주부 등

도배·장판·싱크대·전등 등을 수리

성북구내 봉사단 9곳 장비 등 공유

같은 시간, 박정수 할머니 집에서는 장판 기술자인 심경보씨가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짬을 내 봉사하러 왔다. “거실 장판은 예술적으로 깔아야지, 호호.” “그래서 고수가 왔잖아.” 심씨가 오자 다른 회원들이 반기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회원들은 밝은 얼굴로 손발을 맞춰 가며 작업했다. 거실의 헌 장판을 걷어내자 시멘트 바닥에 물기가 흥건했다. 서너 명이 수건으로 물기를 두어 차례 닦아냈다.

40년 넘게 건축업을 하며 집수리 봉사를 해온 장종안씨는 “반지하 집은 수리에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어르신들이 깨끗하게 만들어줘 고맙다고 하면 힘든 것도 아쉬움도 잊고 보람이 더 크다”며 “회원들 전부가 맥가이버가 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솔선수범해 일한다”고 자랑했다.

참여자가 많아 이날 봉사는 반나절 만에 마무리했다. 오래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갈비뼈가 늘 아픈 박정수 할머니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문밖까지 나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봉사자들은 “할머니 건강하게 지내시고, 저희 또 올게요”라고 답했다. 금우회는 집수리를 한 집에 불편한 점이 있는지 사후 점검도 한다.

성북구의 저소득층 집수리 지원 사업에 함께하는 전문봉사단체는 모두 9곳이 있다. 행정동을 기반으로 하는 단체에는 금우회를 비롯해 종암동 청년회, 장위1동 희망하우스, 석관 상공인회, 정사모(정릉을 사랑하는 모임) 5곳이다. 기업이나 업종 기반 단체는 한마음봉사회(청수·한일정화 직원 모임), 인건모(인테리어와 건축을 하는 사람들 모임) 2곳이다. 이밖에 고집(고려대 해비타트동아리), 쿠호프(전국재해구호협회 소속 봉사단)가 있다. 회원 특성에 따라 활동 방식과 장소는 다르게 운영된다.

이들 단체 임원 10여 명이 지난해 11월 그간의 활동을 공유하는 간담회를 성북구자원봉사센터에서 했다. 집수리 봉사 범위를 어디까지 봐야 하는지, 단열 등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뺀 집수리 봉사가 갖는 한계와 1일 봉사라는 시간 제약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 등 고민을 공유했다. 석관 상공인회대표가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반지하 화장실처럼 급한 경사 때문에 노인들의 낙상위험이 있는 집이 성북구에 적잖다”고 우려하자, 참석자들은 개선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들 봉사단체는 앞으로 집수리 기술과 장비, 봉사활동 일정 등의 정보를 공유하기로 뜻을 모았다.

간담회에선 집수리 봉사를 받은 어르신들이 기부에 나선 훈훈한 얘기도 오갔다. 집수리봉사단이 집을 고쳐줘 고맙다고 한 할머니가 구청 복지과를 직접 찾아와 “감사의 뜻으로 매달 3만원씩 후원하겠다”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써달라고 부탁했단다. 또 다른 어르신도 지역의 장애아동시설에 기부해달라고 성금을 내놓았다. 민지선 성북구 복지정책과장은 “집수리 전문봉사단은 우리 구의 자랑이고, 여러분의 노력이 나눔 문화 확산도 끌어내고 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며 활짝 웃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