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굴렀다…그리고 더 긴 모험을 시작했다”

전직 기자 고재열 여행 감독이 ‘책 캐리어’ 들고 전국 방방곡곡 누비는 이유

등록 : 2020-05-28 14:34 수정 : 2020-05-29 14:02
올 들어 ‘캐리어 도서관 프로젝트’ 진행

낡은 캐리어에 책 담아 기증하며 여행

‘책 캐리어’는 어쩌면 떠남을 위한 핑계

그러나 도착지엔 새로운 도서관 생겨

“주기적으로 책장을 솎아주면 책장과 나 사이에 긴장이 유지되잖아요. 캐리어 도서관 프로젝트의 장점이기도 하죠.” 지난 5월13일 여행 감독 고재열씨가 서울로7017 ‘여행자의 서재’에서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은 책 캐리어를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도로 보낼 준비를 하며 말했다.

‘소명을 다했다. 후회 없이 굴렀다. 몸통의 상흔은 한 시절의 증거. 이제 창고나 분리수거장이 모든 여행의 종착지겠지. 하지만 바퀴가 멈춘 그 지점에서, 더 기나긴 모험이 시작됐다!’

‘버려진 캐리어’ 처지에선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난 5월13일 오후 서울로7017 ‘여행자의 서재’에서 여행 감독 고재열(44)씨를 만났다.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도로 보낼 낡은 책 캐리어 12개를 정리하고 있었다.

“캐리어를 좋아합니다. 여행 좋아하는 이에게 ‘오래 쓴 캐리어’는 남달라요. 이 자체가 ‘우주’거든요. 어느 날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갔는데 멀쩡한 캐리어들이 마구 버려져 있더라고요. 이걸 ‘책 운반용’으로 재활용해야겠다 싶었죠.”


‘캐리어 도서관 프로젝트’란?

고재열 감독이 지난 2월 문을 연 ‘캐리어 도서관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책 기증자와 여행자들이 경계 없이 모여 꾸린 ‘여행자 플랫폼 프로젝트’이자 ‘지속가능한 여행상품’이다. 기증자들이 안 쓰는 캐리어에 기증할 책을 채워 지정 장소로 보내면, 이미 떠날 준비가 된 여행자들이 나서 캐리어를 수거한다. 며칠 뒤 미리 신청받아둔 기증처로 방방곡곡 실어 나른다.

서울에서 시작한 팔도유람이다. 캐리어란 물성에 빠진 일이 이 프로젝트의 씨앗이라면, 시사주간지 <시사인> 기자 시절 고 감독이 기획·실행한 ‘기적의 책꽂이 프로젝트’(2011), ‘강정 십만대권 프로젝트’(2013) 등에서 얻은 “기부봉사의 꽃은 노가다”란 깨침이 비료가 됐다. 당시 총 15만 권가량의 책더미를 ‘자신의 근육을 써가며’ 직접 옮기면서 ‘도구 쓰는 인간’이 되어야 함을 절감했다고 한다. 불현듯 발견한 바퀴 달린 캐리어는 사람 힘으로도 책을 넣고 거뜬히 근육의 힘으로 운반할 수 있는 최적의 운송수단이었다.

캐리어 도서관 프로젝트로 총 25개 캐리어가 기증처인 욕지도 빵집 ‘무무’로 향하는 배에 실렸다.

캐리어의 이동성과 기증자 책 취향에 주목하니 캐리어가 각각 ‘움직이는 작은 도서관’이 됐다. 기증자 이름이 달린 캐리어를 열어봤다. <태백산맥> <광장> 같은 시대를 밝힌 한국문학부터 환경보호, 건축기술, 정신분석, 커뮤니케이션, 미학 등 기증자들 삶이 엿보이는 책들이 빼곡하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행자 진선미씨가 이틀 뒤 욕지도에 도착해 찍은 사진을 보냈다.

앞서 6개의 캐리어를 500여 권 책으로 꽉꽉 채워서 기증하고, 직접 기증처가 있는 욕지도로 먼저 떠난 여행자 진선미(41)씨는 “아이들과 남편까지 함께 기증할 책 캐리어를 들고 배에 올랐다. 구독했던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 아이들이 커서 안 보는 그림책, 지인들이 기증한 책이다. 좋은 여행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캐리어 도서관 프로젝트’의 매력”이라고 소감을 전해왔다.

‘책-사람-여행’ 연결하는 삼박자 여행길

이 때문에 캐리어 책 여행은 날이 갈수록 ‘우연의 묘미’ 속에서 더욱 멋있어진다. 보통 여행상품이 여행지를 선정한 뒤 그에 맞는 사람을 모은다면, ‘캐리어 도서관 프로젝트’는 맞는 사람을 먼저 모으고, 기증처가 나타나면 여행지 삼아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이 박자 맞춰 잘 돌아가는 건 “여행업계가 코로나19로 불바다가 된 상황”에서 장소보다 ‘사람과 의미’에 초점을 뒀기 때문이다.

“겪어보니, ‘사회 서열’과 ‘여행 서열’이 달라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야말로 여행지를 실감 나게 만드는 요소더군요.”

고 감독은 예를 들면서 말을 이어갔다.

“삼천포를 며칠 여행하고 쓴 여행작가의 멋들어진 수기보다 어린 시절 갑갑했던 고향 삼천포를 떠났다가 결국 어른이 되어 귀향한 시민의 얘기가 더 느낌이 있을 수 있어요. 자칭 식객이라 자부하는 전문가들의 포항 물회 탐방기보다 무뚝뚝한 포항 남자가 자주 간다는 이름 없는 마을식당이 ‘횟밥’을 더 잘하고요.”

그럼 ‘책 캐리어’의 역할은 뭘까.

“여행이 질리지 않을 ‘의미’죠. 멀리 떠날 ‘핑계’고요. (웃음) 전세계로 ‘책을 나르기 위해’ 부지런히 떠나야 하는 사정이 생긴 거죠. 동행하는 여행자와 기증자들 선정이 비슷해요. 명사의 서가나 학자의 서가도 좋지만, 저는 그보다 ‘생활밀착적’ 서가에 마음이 가요.”

그가 말을 쉬면서 한편에 놓인, 책이 가득 담긴 캐리어를 가리켰다.

“아이 셋 키운 어머니가 기증한 캐리어예요. 저걸 어떻게 값을 매길 수 있겠어요?”

책 캐리어는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그곳을 ‘도서관’으로 만든다. 고 감독이 백령도 땅굴을 돌아볼 땐 공조시설을 활용해 ‘평화’를 주제로 책을 기증받아 마을 사람들과 관광객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캐리어 도서관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 “면장님의 흔쾌한 허락 아래” 실행 중이다.

퍼포먼스도 해볼 계획이다. 고 감독은 2주 전 “인생으로 검증한 사람들”과 인천 옹진군 무인도인 하공경도에 머무른 사진을 꺼내 보였다. 사진 속 하공경도에는 아슬아슬한 간조 때, 모래톱 가득한 물새들 궤적이 까마득히 보였다. 고 감독은 궤적 따라 책 캐리어를 설치한 뒤 ‘갯벌 독서’도 해보고 싶다고 한다.

고 감독은 기자 시절 오지 여행을 계획하고 팸투어에 참여하면서, 여행을 설계하고 사람을 운반하는 일이 즐거웠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인생에 과부하가 걸렸다고 느낀 순간” 펜을 놓고 사람을 붙잡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뭘까. 인생의 중간 정산 시점이자 인간관계의 중간 급유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는 “송년회와 장례식을 통해서만 지인을 만나던,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시기에 만난 ‘여행 친구들’이야말로 자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긴 여행에서 돌아오면, 하나의 마을을 만든 기분입니다. 1차 목표는 10만 권, 차차 2천만 권까지 기증 도서량을 채워가려고 합니다.”

고 재열 여행 감독의 책 캐리어

캐리어 도서관 프로젝트는 시즌별로 나눠 운영한다. 시즌1은 6월3일까지 영등포구에 있는 서울 주거의제거점공간 서울하우징랩에서 진행한다. 시즌2는 6월15일부터 문화역서울284에서 재정비해 문을 연다. 캐리어 전시, 여행 동아리방 운영, 여행상품 소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페이스북 그룹 ‘캐리어 도서관'에서 책 기증 방법과 여행 경로를 안내하고 있다.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