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땡땡” 소리에 기차 건널목 앞에 자전거가 멈췄다

장태동 여행작가, 따릉이로 한강을 여행하다 ③ 용산구 한강대교 북단~마포구 평화의 공원

등록 : 2020-06-11 14:56
한강로동 ‘땡땡 마을’의 기차 건널목

천주교 신자 순교의 아픔 담은 새남터

‘토정 이지함선생 집터’를 품은 아파트

자전거 달린 길엔 따뜻한 기억이 남아

‘땡땡땡땡’ 기차가 지나가는 건널목 정지선 뒤로 차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을 서울에서 본다. 기찻길 옆 지붕 낮은 집 골목에 달맞이꽃이 환하게 피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던 조선시대 사람 토정 이지함, 그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토정 마을’의 흔적이 마포의 한 아파트 단지에 남아 있다. 저무는 시골길을 닮은 풍경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낡은 자전거가 있어 따듯하다.


달맞이꽃 피어난 기찻길 옆 골목길

6·25 전쟁 때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던 현장을 알리는 안내판.


한강대교 북단 서쪽 인도 끝, 출발 지점 바닥에 동판 하나가 박혀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이라는 제목의 동판에 ‘6·25 발발 직후 정부의 일방적인 교량 폭파로 피란민 800여 명 사망’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잠시 한강을 바라보고 출발했다.

한강대교 북단에서 한강 둔치 자전거길로 바로 내려가지 않은 이유는 용산구 한강로동 ‘땡땡 마을’의 기차 건널목 때문이었다. 한강대교 북단 서쪽 인도에서 건널목을 건너 250m 정도 가면 왼쪽으로 길이 열린다. 그 길로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기차 건널목이 보인다.

‘땡땡 마을’ 기찻길.

이 마을의 별칭이 ‘땡땡 마을’이 된 건 기차가 오갈 때 건널목에 울리는 땡땡거리는 소리 때문이다.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가고 차와 사람들이 그 뒤에 줄을 서서 기다린다. 철길 옆에 핀 키 작은 풀꽃이 레일 앞에서 반짝인다. 기차가 지나가고 차단기가 올라가면 기다렸던 모든 것들이 막 움직이기 시작한다. 햇빛 부서지는 철길 성기게 자란 들풀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기찻길 옆 오막살이, 누군가의 보금자리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달맞이꽃이 환하게 피었다.

건널목을 뒤로하고 가다가 도로를 만나면 횡단보도를 건너 우회전한다. 승강기에 자전거를 싣고 올라가면 이촌 고가도로 인도가 나온다. 조금 가다가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앞에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 있다.

새남터는 한양 성 밖 한강 가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시대 초부터 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과 중죄인을 처형했던 처형장이 있었다. 새남터 위치는 현재 용산우체국 부근이었다고 한다. 새남터라는 이름은 풀과 나무를 아울러 ‘새나무’라고 불렀다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죽은 자의 넋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굿인 ‘지노귀새남’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사형장이 있던 곳이니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1801년 천주교 신유박해 이후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많은 천주교 지도층, 평신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새남터의 원래 자리와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은 멀지 않다.


가요 ‘마포종점’ 노래비와 마포나루터

성당을 뒤로하고 조금 가다가 운동기구가 있는 작은 공간을 지나 한강 둔치 자전거길로 가는 육교를 건넌다. 이제부터 한강 둔치 자전거길을 따라 서쪽으로 달린다. 1924년 세운 최초의 한강 수위 관측소인 구용산 수위관측소를 만났다. 1977년 폐쇄됐다. 서울시 기념물 제18호다.

마포어린이공원에 가요 ‘마포종점’ 노래비와 그 노래에 대한 유래를 새긴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한강공원 마포종점 나들목으로 나가면 마포어린이공원이 나온다. 그곳에는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은방울자매가 노래한 가요 ‘마포종점’ 노래비와 그 유래가 새겨진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마포종점 유래비 내용에 따르면 1907년 서대문에서 마포에 이르는 전차 노선이 처음 개통됐고 1968년 서울의 노면전차가 일제히 운행을 멈추게 됐다. 그때 마포정류장은 현재 불교방송국이 있는 건물 부근이었다. ‘마포종점’의 노랫말을 쓴 정두수 작가는 마포구 도화동에 살았다. 서민의 삶과 함께했던 전차가 사라진다는 아쉬움과 여인의 사랑 이야기, 마포종점 주변 풍경을 노랫말에 넣었다.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 중에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라는 구절이 오래 남는다.

내친김에 불교방송국까지 자전거를 달렸다. 그곳에 마포전차 종점과 3·1 독립운동 기념 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군중이 저녁 8시께 이곳에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갔던 길을 되짚어 한강 둔치 자전거길로 다시 돌아왔다. 마포나루가 있던 곳, 마포나루터를 알리는 푯돌 앞에서 자전거를 멈췄다.

마포나루의 옛 이름은 삼개나루였다.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개인데 그중 강 갯벌이 삼베를 덮어놓은 듯해서 ‘삼개’라고 했다는 설에 마음이 실린다.

이름 유래보다는 그곳 한강 풍경을 이야기한 옛사람의 말에 관심이 더 간다. 옛날 마포나루에서 양화나루에 걸친 한강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한양의 명승지 열 곳(한도십영) 중 하나가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긴다는 마포범주(麻布泛舟)였다고 한다.


낡은 자전거가 가는 시골길 같은 풍경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사람 토정 이지함은 마포나루 부근에 살았다. 한강공원 마포 나들목으로 나가면 아파트 단지가 있다. 단지 안에 ‘토정 이지함 선생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 비석 내용에 따르면 해방 직후까지 이곳에 토정의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있었다. 토정이 살던 옛 고을 이름을 아랫토정, 윗토정 등으로 불렀다. 어린이 놀이터 한쪽에는 토정 이지함 선생 영모비와 토정의 집이 있었던 곳을 알리는 푯돌이 나란히 서 있다.

토정 이지함의 집이 있던 곳을 알리는 푯돌과 영모비.

아파트 단지 인근 토정로에 토정 이지함의 상과 그와 얽힌 일화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다. 토정 이지함은 바다와 갯벌 등을 이용하여 곡식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바다와 땅을 이용해 사람들이 먹고사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마포나루와 그 주변 마을은 산물과 사람이 모이고 여러 산업이 부흥했던 곳이다.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조세 곡물을 보관하던 광흥창에서 유래한 마을이 창전동이다. 염리동은 소금 매매 상인이 많이 살던 동네였고, 젓갈을 보관하기 위한 옹기 생산지도 이 일대에 있어 ‘옹리’ 또는 ‘독막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도 ‘독막로’라는 주소가 있고 동막이라는 간판도 보인다.

양화나루 푯돌 앞에서 잠시 멈춘다. 한강에서 솟은 절벽이 누에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아래 양화나루가 있었다. 양화는 갯버들의 꽃이다. 예전에 갯버들이 많았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눈 내린 양화진 풍경은 조선시대 한양을 대표하는 열 개 풍경 중 하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초록길 가는 길’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가서 망원정 터에 도착했다. 망원정은 조선시대 임금이 해마다 봄과 가을에 농사일을 살피기 위해 행차했을 때 들렀던 곳이다. 세종 임금도 이곳을 찾았다. 그때 마침 소나기가 내려 들판이 촉촉하게 젖었는데, 이를 보고 ‘기쁜 비를 만난 정자’라는 뜻의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이름을 내렸다. 그 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정자를 물려받아 ‘아름다운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멀리서 바라보다’라는 뜻인 ‘망원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정자는 1989년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바깥쪽에는 망원정, 안에는 희우정 현판이 있다.

갔던 길로 돌아와 다시 한강 둔치 자전거길을 달린다. 난지한강공원에서 강변북로를 건너는 육교를 지나면 하늘공원 메타세쿼이아길 입구가 나온다. 메타세쿼이아와 이태리포플러, 거대한 나무들이 1㎞ 정도 줄지어 섰다. 그 사이로 난 흙길은 1970년대 시골 신작로를 닮았다. 짐받이에 삽을 실은 낡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저씨 뒤로 저문 길이 따라온다. 길이 따듯하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