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조선 시대 남산골의 그 많은 정자들, 다 어디 갔을까?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㉙ 서울시 중구3

등록 : 2021-07-15 15:02
‘앉으나 서나 정자’라는 남산골 옛 모습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그 모습 재현한 남산골공원 찾아가서

작은 물줄기에 옛 소리 아련히 듣는다


그러나 눈 돌리니 주변은 온통 ‘도심’뿐

남산골공원. 옛 남산 골짜기의 모습을 재현해서 작은 물길을 만들었다.

남산 골짜기가 아름다워 옛사람들은 정자를 짓고 경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그 풍경을 조금이나마 재현한 곳이 장충단공원과 남산골공원에 있다고 해서 그곳을 찾았다. 작은 물줄기와 오솔길이 있는 숲이 좋았다. 오래된 나무들은 옛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계유정난의 시작,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마지막 만남을 지켜봤을 나무 한 그루는 농협중앙회 건물 앞에 있다.


농협중앙회 건물 앞 회화나무. 5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김종서와 회화나무

1453년 10월 어느 날 밤 수양대군은 말을 타고 돈의문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김종서의 집이었다. 김종서의 집 앞에 도착한 수양대군을 맞이한 건 김종서의 아들이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보기를 청했고,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다. 김종서는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했다. 수양대군은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라며 거절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김종서와 수양대군을 비추고 있었다. 김종서와 수양대군 사이에 칼날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을 것이다. 김종서도 문 앞에서 더 나서지 않았고 수양대군도 함께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사모(조선시대 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에 뿔이 떨어졌다며 김종서에게 뿔을 빌려달라고 했고, 김종서는 자신의 사모뿔을 빼주었다. 살기가 느껴지는 삼엄한 긴장감은 더 짙어졌다. 이어 수양대군은 부탁할 것이 있다며 편지를 건넸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달빛에 비춰보는데 수양대군 쪽 사람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다. 계유정난(수양대군이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벌인 사건)의 시작이었다.

현재 농업박물관 앞에 김종서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다. 정동사거리 돈의문 터에서 농업박물관 앞까지 약 200m 거리, 그 옛날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해 수양대군이 돈의문에서 지나온 거리다. 그리고 그 주변에 5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하는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김종서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고, 어린 조카를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찬탈하려고 계획하고 그 첫 과업으로 김종서를 제거했던 야욕에 찬 수양대군의 그날 밤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김종서 집터를 알리는 푯돌을 보고 농업박물관 건물 옆을 지나 농협중앙회 건물 앞마당으로 가는 길, 멀리서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굳건하게 세월을 버틴 자태가 빛난다. 옛이야기에 회화나무에는 소리를 내어 사람의 길흉을 알려주는 자명괴라는 꽃이 딱 한 송이가 피어난다고 한다. 김종서는 자명괴의 예지를 듣지 못한 것일까?

안의사광장. 안중근 의사의 글이 새겨진 커다란 돌과 그 돌들을 품은 작은 숲.

안중근의사기념관 앞 고목과 숲, 회현동 은행나무 고목을 보다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 ‘안의사광장’에 도착했다. 안중근 의사의 글이 새겨진 거대한 돌들이 하늘 높이 자란 나무들 사이에 놓였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1909년 중국 뤼순 법정에 제출한 안중근 의사의 글도 바위에 새겨졌다. ‘이등박문은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삔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늙은 도적 이등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안의사광장의 오솔길을 엄마와 아이들이 걷는다. 그 한쪽에 270년 넘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여러 나무와 어울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호수를 알리는 안내판을 간신히 찾아 그 나무를 살핀다. 그 아래 운동기구가 있는 작은 마당 한쪽을 130년 넘은 모감주나무가 지킨다.

안의사광장 주변 보호수 두 그루를 보고 백범광장 호현당 앞을 지나 소파로로 접어들었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차도를 따라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서면 퇴계로8길이다. 그곳에서 회현동 은행나무와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정광필 집터에 대한 안내 글을 읽고 회현동 은행나무를 찾아간다. 회현시범아파트 앞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드니 정광필에 대한 이야기가 벽에 적혀 있다. 정광필의 손자인 정유길의 문집 <임당유고>에 수록된 시를 통해 회현동의 자연 풍경과 이곳에 살던 옛사람들의 정서를 엿본다.

“그대의 한가한 성미 세상사 다 버리고/ 남산으로 찾아들어 오솔길 넓혔네/ 바위와 골짜기 형편 따라 집 지으니/ 앉으나 서나 모두가 못이요 정자라네”

우리은행 본점 건물 앞에 5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은행나무와 ‘동래정씨회현방옛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다. 안내 글에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정광필이 살던 집터라고 적혔다. 그 이후 20세기 초까지 400여 년 동안 동래 정씨 집안이 대대로 살았다. 정광필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 집 앞 은행나무에 서대(정승이 두르는 물소뿔 장식 허리띠) 12개를 걸었고, 이후 정광필의 집안에서 12명의 정승이 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우리은행 본점 건물 앞 도로 가운데도 5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남산골공원 타임캡슐.

옛 남산의 계곡과 숲이 이랬을까?

남산골 한옥마을을 품고 있는 곳이 남산골공원이다. 남산골공원 정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연못과 정자가 있다. 연못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거슬러 눈길을 옮기면 작은 도랑이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 물길을 거슬러 걷는 길이 남산골공원 숲길이다.

조선시대 남산 골짜기에 정자를 짓고 경치를 즐기며 사람들이 살았고, 남산의 옛 골짜기를 재현했다는 안내 글을 보고 숲길을 걸었다. 작은 물줄기가 숲 그늘 아래 흐른다. 그 옆에 난 오솔길도 숲 그늘에 덮였다. 숲길에서 만난 전망대는 남산골공원과 그 주변 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산 줄기가 남산골공원을 지나 도심에 닿는 형국을 보았다. 다시 숲으로 내려와 숲길을 걷는다. 그 길 끝에서 타임캡슐을 만났다. 서울의 도시 모습, 시민생활, 사회문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을 넣어 보관 중이다. 1994년 만들었고, 400년 뒤인 2394년 11월29일 후손에게 공개된다고 한다.

남산골공원 남쪽, 주택과 건물이 만든 복잡한 골목길을 따라 필동2가 128-9에 도착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자라는 150년 정도 된 느티나무는 옛사람들이 즐겨 찾던 옛 남산 골짜기 풍경 속 한 그루 나무였을 것이다.

남산공원길을 다니는 순환버스가 정차하는 남산 북측순환로 입구 정류장 북쪽 숲에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가 두 그루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 장충단공원을 먼저 들렀다. 조선시대 수표교와 장충단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산 골짜기를 재현했다는 풍경도 한몫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때 순국한 사람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1900년에 고종황제가 장충단을 세웠다. 장충단비도 이때 함께 세웠다. 장충단비 앞면에 새겨진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황제가 쓴 것이다. 일제는 1920년 후반에 이곳에 벚나무를 심고 공원을 만들었다.

장충단비를 보고 수표교로 향했다. 수표교 위에서 다리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을 본다. 옛날 남산 골짜기 계곡 물줄기도 이랬을까?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 작은 폭포를 만났다.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힌다. 잠시 쉬었다 남산으로 향했다.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숲이 우거져 길이 지워졌다. 가까이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서 멀리서 숲만 보고 돌아섰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