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개방된 왕릉 숲길 통해 ‘500년 역사’ 속을 걸어가다

(60) 태릉·강릉·의릉 그리고 연산군 묘역을 품은 숲길과 북한산둘레길 왕실묘역길

등록 : 2022-10-1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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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 향나무 고목 사이로 능이 보인다.

문화재청, 왕릉 숲길 10곳 한시 개방

중종 왕비인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과

명종 비 인순왕후의 강릉 잇는 1.8㎞

커다란 팥배나무가 ‘역사’를 마중했다

왕의 숲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지난 10월1일부터 11월30일까지 조선왕릉의 숲길 10곳을 개방했다. 그중 서울에 있는 태릉과 강릉을 잇는 숲길, 의릉을 품은 천장산 숲길, 연산군 묘역 참나무 숲을 다녀왔다. 연산군 묘역 참나무 숲을 보고 연산군 묘역 앞으로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왕실묘역길까지 걸었다.


죽어서도 어머니 슬하 못 벗어난 명종

태릉은 조선시대 중종 임금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다. 그의 아들 명종이 임금에 오를 때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문정왕후 윤씨가 8년 동안 수렴청정했다. 임금의 외척세력이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경남 산청의 선비 남명 조식이 당시 상황을 두고 ‘어린 임금(명종)과 수렴청정하는 궁중의 과부(문정왕후 윤씨)가 억만 갈래의 인심을 어찌 알겠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본 명종의 마음은 굳어졌으나 훗날 조식의 충언을 받아들이고 그를 불러 조언을 구했다.

조식은 명종에게 위에서 먼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아랫사람들도 마음을 다해 도리를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식을 만나기 위해 명종은 쇠약해진 조식에게 약재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여 궁으로 들어와 충언을 아끼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해서 명종과 조식의독대는 1566년에 이루어졌다.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나서 명종이 자기 뜻을 제대로 펼쳐보기 위해 조식에게 도움을 청한 것인데, 아쉽게도 명종은 그 이듬해 죽었다.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2년 뒤 명종도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명종과 부인 인순왕후 심씨의 능은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과 가까운 곳에 있는 강릉이다. 죽어서도 어머니 슬하를 벗어나지 못한 형국이다. 태릉과 강릉은 1.8㎞의 숲길로 연결됐다.

태릉에서 강릉 쪽으로 걸었다. 태릉 정문으로 들어가면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 완친왕의 옛 무덤에 있던 석물들을 굽어보는 모양의 소나무 몇 그루가 먼저 눈에 띈다. 능역 비각 뒤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시작된다.

커다란 팥배나무가 마중하듯 길가에 서있다. 길 바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계곡물 소리가 숲에 울린다. 쪽동백,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팥배나무, 산벚나무가 계곡 물가에서 자란다. 굳고 터진 줄기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커다란 나무와 어린나무가 어울렸다.

넓은 숲길이 완만해서 걷기 좋다. 강릉까지 920m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았다. 구불거리며 높게 자란 소나무 줄기가 겹쳐서 보는 방향에 따라 색다른 풍경을 만든다. 능선길 풍경의 백미다. 짧은 내리막길은 바로 강릉으로 이어진다. 능역 홍살문을 지나 강릉의 정문으로 나가는 길가에도 숲은 내내 우거졌다.

의릉. 역사경관림복원지역 소나무숲길.

의릉을 품은 천장산 숲길을 걷다

사극의 단골 이야기 중 하나인 ‘장희빈’. 장옥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희빈 장씨는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궁궐 생활을 시작했고, 숙종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왕비가 된다. 그의 아들이 경종 임금이다. 경종 임금의 능이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이다.

의릉 숲은 사실상 의릉 정문 앞에서 시작된다. 정문 앞 숲은 사람들로 붐볐다. 대부분 동네 사람들로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장기판을 벌였다. 장기판 주변에 훈수꾼들이 꼬인다. 호각지세 장기판의 끝판도 궁금했지만, 구름 끼고 간혹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아직 남아 있는 파란 하늘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돌아서서 의릉 정문으로 들어섰다.

의릉은 동원상하릉이다. 왕과 왕비의 능은 보통 옆으로 나란히 배치하는데, 의릉은 위아래로 배치됐다. 풍수적으로 볼 때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맥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위에 있는 능이 경종의 능이고 아래 능이 두 번째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의릉 비각 뒤 도랑을 건너 역사경관림복원지역으로 들어갔다. 숲을 복원하기 위해 작은 소나무를 심었다. 숲 사이로 이리저리 길이 났다. 그 길을 다 걷고 천장산 입구에 도착했다.

천장산(天藏山), 이름을 그대로 풀면 ‘하늘이 감추다’ 정도 되겠다. 천장산 숲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걸까? 산 북동쪽에 의릉이 있고, 경희대와 카이스트 서울캠퍼스 등에 끊긴 숲 남쪽에는 을미년에 살해된 명성황후의 능이 있었고,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과 영친왕의 아들 묘인 숭인원이 있다.

천장산이 품은 조선시대 왕과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숲으로 들어갔다. 숲의 장벽 가운데 난 좁은 계단길이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계단에 다 올라서서 숲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 첫머리에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음습한 기운이 옴팡진 숲에 가득하다. 골짜기엔 물이 흐르고 산기슭 거친 풀밭에 들꽃이 더러 피었다.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들이 숲길을 호위하듯 이어진다. 구부러지고 뒤틀린 소나무 줄기가 이리저리 겹쳐서 만들어내는 풍경이 보는 시각마다 다르다. 간혹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가 터지면 숲 밖 풍경이 그림이 되고 나뭇가지는 액자의 틀이 된다. 북한산 산줄기, 용마산과 아차산 산등성이, 그 사이에 있는 도시의 건물들이 그 안에 담긴다. 꼭대기 부근 바위 위에 올라서면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길은 외길이라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야 한다.

천장산 정상부에서 본 풍경. 북한산과 도봉산이 한눈에 보인다.

연산군 묘역과 왕실묘역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역을 들르기 전에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을 먼저 찾아봤다. 안내판에 세종 임금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는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하고 지혜롭고 총명해서 세종 임금이 특별히 아꼈다고 적혔다. 세종은 정의공주에게 옥수동 앞 한강에 있었던 저자도와 광진구에 있던 정자 낙천정을 선물했다고 한다. 양효공 안맹담은 정의공주의 남편이다.

정의공주 묘에서 가까운 곳에 연산군 묘역이 있다. 연산군 묘역에는 다섯 기의 무덤이 있는데, 맨 위 무덤 두 기가 연산군과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다. 그 아래 태종 임금의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있고, 그 아래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능양위 구문경의 묘가 있다. 영조 임금은 연산군의 묘를 외손이 돌보게 하고 설, 단오, 추석, 동지와 죽은 날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강화도로 유배돼 그곳에서 죽었다. 무덤도 강화도에 있었는데, 부인 신씨가 무덤을 옮겨달라고 요청해 지금의 자리에 묻혔다. 강화도 교동도 주민들에 따르면 교동도 부군당에 연산군과 부인 신씨를 모시고 있다.

연산군 묘역 참나무숲길은 이번에 새로 조성됐다. 500m 정도 되는 숲길이다. 짧은 숲길이 아쉽다면 연산군 묘역 앞으로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왕실묘역길을 따라가면 된다.

연산군 묘역 앞에 있는 방학동 은행나무.

연산군 묘역에서 나오는 길에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서울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됐던 나무다. 문화재적 가치를 높여 2013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천년 은행나무로 알려졌는데, 조사 결과 550년 정도 된 걸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산둘레길 우이동 방향, 우이령 입구까지 1.3㎞ 남았다는 이정표를 따라 산길로 접어든다. 왕실묘역길을 알리는 안내판을 지나 숲길을 걷는다. 가을 해가 기울어 나무 그림자가 숲길에 길게 드리운다. 쉽게 끝나는 숲길이 아쉽다. 우이천 건너편 우뚝 솟은 인수봉과 백운대 뒤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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