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혁명의 도시’ 교토, 격동의 ‘메이지유신’ 무대

③ ‘유신의 길’에서 모모야마릉까지 일본 혁명의 현장을 걸으며

등록 : 2022-11-10 15:23 수정 : 2022-11-1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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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혁명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희귀한 사진(1865년 초 나가사키). 사카모토 료마, 가쓰 가이슈,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이토 히로부미 등이 있다고 한다

곳곳의 유적들, 역사교육·관광명소로

왕정복고 선언 니조성 세계문화유산

유신 도운 여관 주인 신의 반열 오르고

메이지왕 부부 무덤 시멘트로 덮어놔


유신 지사를 위한 신사·묘지·기념관

역사의 승자와 패자 함께 추모·전시


순종이 머물렀던 조라쿠칸 역사까지

“한국인이라면 피하지 말고 응시하길"

현대 일본의 초석이 된 메이지유신(1867). 교토는 그 무대였다. 왕정이냐 막부냐, 개화냐 외세 배격이냐의 대의와 명분을 걸고 벌어진 20여년에 걸친 대활극. 그때 교토는 혁명의 도시였다. 혁명의 활극이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진 곳이기에 사건도 많고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극적이다. 15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도시 곳곳에 지금도 생생한 어제의 일인 듯 그 흔적이 ‘근대유산’의 이름으로 후손과 외국관광객에게 역사교육 겸 관광자원이 돼주고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왕정복고를 결정한 니조성(세계문화유산)

메이지유신이 한편의 영화라면 주인공은 크게 세 부류이다. 혁명 주체인 ‘유신 지사’들, 그 반대편의 도쿠가와 막부 그룹, 그리고 일본 왕 메이지가 있다. 영화가가 역사에 충실하다면 결국 이 셋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 수 없다.

전통거리 ‘기온’의 야사카신사 뒤편 마루야마공원 일대는 늘 사람들로 붐비는 관광명소이다. 인기 높은 소로 ‘네네의 길’에서 ‘니넨판’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고다이지 절을 끼고 히가시야마로 오르는 비탈길이 보인다. ‘유신의 길’이다. 그 길을 걸어 오르면 왼쪽에 신사가 있고 오른쪽에 기념관 건물이 보인다. 신사에는 메이지유신 과정에 투신했다가 죽은 600여 명의 무덤이, 기념관 ‘료젠역사관’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전시돼 있다. 교토에 온 한국인이라면 이곳을 피해 가선 안 된다. 쓰라리지만 일본 혁명의 파고에 뒤집힌 조선, 그 허망한 대한‘제국’이 있었으므로.

1917년 순종이 메이지 무덤에 참배하러 왔다가 묵은 ‘조라쿠칸’.

료젠역사관은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에 걸쳐 활약한 인물들에 관한 전문전시관이다. 일본의 세계적인 실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가 주도해 1970년 문을 열었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료젠역사관은 마쓰시타의 ‘애국심’ 위에 서 있다. “자랑스러운” 유신의 영웅들 옆에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유신파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죽은 히지가타 도시조 등, 이를테면 역사의 승자와 패자를 다 같은 ‘일본의 영웅’으로 기념하고 있다. 관람객을 맞는 첫 인물이 가쓰 가이슈인 것도 인상적이다. 그는 신정부군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목숨을 건 협상을 통해 일본의 내란을 막고 에도(지금의 도쿄)를 파괴 일보 직전에서 구한 막부의 신하였다.

시멘트로 덮은 메이지왕 무덤.

역사관 2층 한쪽엔 마쓰시타의 작은 입상과 함께 ‘일본의 마음’이란 글이 걸려 있다. “메이지유신의 대업을 완수한 것은 20~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며 일본 청년들에게 ‘일본의 마음’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는 글이다. 마쓰시타에게 일본의 마음은 “여러 외국으로부터 우수한 인재와 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을 일본에 맞는 기술로 배양시킨 전통”이다.

료젠역사관 맞은편 교토료젠호국신사는 원래 사카모토 료마와 그의 동지 나카오카 신타로의 무덤 자리인데, 메이지왕의 명으로 ‘호국’ 신사와 공동묘지가 조성됐다.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 당한 가와라마치거리의 옛 오미야 자리.

사카모토 료마는 원수지간이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동맹시켜 막부 타도의 길을 열었고(결국 이 일로 막부파에게 암살당했다), 쇼군에게 ‘통일 일본’을 위해 정권을 왕에게 반환하고 의회를 통해 정치에 참여할 것을 권한 ‘선중팔책’으로 유명하다. 영화로 치면 각본, 감독 겸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일본에서 료마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는 그가 머물렀던 여관의 여주인이 신의 반열에 오른 데서도 실감할 수 있다. 교토 남쪽 후시미구에 있는 관광명소 데라다야는 료마가 자객을 피해 구사일생한 여관이다. 이곳은 료마 기념관이나 다름없는데, 마당에는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신 지사들을 도왔다는 여주인 오토세가 명신(明神)이 됐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신’이 된 데라다야 여관 여주인 오토세의 명신비.

료마가 절친한 친구이자 혁명 동지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암살당한 곳은 기온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쿄구 가와라마치거리의 간장가게 오미야이다. 자객의 칼(나중에 발견돼 료젠역사관에 전시돼 있다)을 세번 맞고 절명했는데, 왕정복고가 선포되기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오미야 자리는 지금 회전초밥집이 돼 있고 그 앞에 료마가 죽은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가와라마치거리와 인근 다카세가와 운하 일대는 교토의 이름난 쇼핑타운 겸 유흥가다. 가모가와강변의 야경이 아름답다.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 동상 (마루야마공원).

유신의 주역들과 더불어 이 대하드라마를 이끌고 나간 조연이 있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무게로만 치면 수많은 유신파 인물을 압도하는 면이 있는 마지막 쇼군, 히토쓰바시(도쿠가와) 요시노부이다. 일왕에게 먼저 정권 반환의 뜻을 밝히고, 이후 혁명이 유혈극이 되지 않도록 애썼다는 점에서 후세 일본인들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신하들과 상의 한마디 없이 경천동지할 결심을 세상에 알린 니조성(막부의 집무처. 세계문화유산)도 그래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무대이다. “가까이서 보면 바위투성이지만, 멀리서 보면 후지산 같은 영봉”이라는 드라마틱한 인물평이 이 사람에게 붙어 있다.

메이지유신 전문 기념관인 ‘료젠역사관’.

유신의 길에서 가와라마치 일대를 거쳐 니조성까지는 하루에 돌아볼 수도 있지만, 이곳은 좀 먼 곳에 있다. 교토 남쪽 후시미에 거대한 산처럼 자리잡고 있는 후시미모모야마릉(메이지왕 무덤)이다. 이 무덤은 일본 무덤으로는 특이하게 봉분을 쌓고 시멘트로 덮었다. 당시에는 시멘트 봉분이 특별한 지존에 대한 극례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왠지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메이지왕(재위 1867~1912)은 왕후와 함께 메이지유신이라는 대하드라마의 배경 같은 역할이다. 아무것도 직접 한 정치는 없지만, 거의 모든 정치가 그의 이름으로 제기되고 수행되고 찬양되었다. 메이지 부부는 이 ‘우상’의 역할을 더없이 지엄하면서도 자상한 이미지로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만약 이 드라마가 무성영화라면, 남녀주연상은 당연히 이 부부의 몫일 것이다.

거대한 왕릉은 아무런 표지도 장식도 없었다. 바라보기도 아득한 230개의 계단 아래로 망자가 묻히길 원했다는 마음의 고향, 교토가 멀리 내려다보일 뿐….

메이지릉을 내려오며 생각해본다. 자기 혁신에 성공한 일본은 응분의 보상을 받았고, 실패한 조선은 처절한 대가를 치렀다. 역사는 본래 마음이 없다. 역사에 마음을 새기는 것이 인간이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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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다시 유신의 길로 돌아온다. 기온의 밤거리로 나가기 위해 야사카신사 쪽으로 걸어가면 한 근대양식 건물과 마주친다. 조라쿠칸(長樂館). 길이 영화를 누리자며 이토 히로부미가 이름 붙였다는 근세 일본의 유명한 영빈관이다. 1917년 망국의 ‘황제’ 순종이 메이지 무덤에 참배하기 위해 교토에 와 이곳에 묵었다. 그는 죽은 메이지에게 절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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