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면 무슨 재민겨?” 호림(윤장섭(1922~2016) 선생)의 ‘국가유산 사랑’ 빛나

서울의 작은 박물관 ㊸ 관악구 신림동 호림박물관·강남구 신사동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등록 : 2024-05-30 15:30 수정 : 2024-05-3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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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기업가, 국가유산에 흠뻑 빠져

유물 모아 ‘수백 년 과거’를 현대로 초대

국보 8건, 보물 54건 등 1만9천 점 소장

각종 전시로 ‘옛사람의 삶의 흔적’ 선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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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보면 무슨 재민겨?’ 국가유산을 사랑한 호림박물관 설립자 호림 윤장섭(1922~2016)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 <호림, 문화재의 숲을 거닐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국가유산 수집가로 시작한 그의 국가유산 사랑은 성보문화재단을 만들고 호림박물관을 세워 후대에도 영원히 우리 옛것이 품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남았다. 관악구 신림동 호림박물관과 강남구 신사동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을 돌아봤다. 호림박물관에서 엮은 책 <호림, 문화재의 숲을 거닐다>에 실린, 고인이 된 여러 분의 옛이야기도 한 대목 소개한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2층 전시실에 전시된 토기. 5세기 삼국시대 유물이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3층 전시실. 토기들을 종횡으로 줄을 맞춰 전시했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4층 전시실에 전시된 5세기 삼국시대 금관.

신림동 호림박물관 1층.

사업가 윤장섭, 국가유산 수집가의 길을 걷다

1969년 윤장섭씨는 소공동 성보실업 사무실로 찾아온 손님 최순우, 황수영씨를 맞이했다. 그들은 월간<고고미술>의 후원자를 찾던 중이었다. 그동안 간송 전형필씨의 후원으로 잡지를 발행했는데 그가 세상을 뜨고 난 뒤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개성 출신 사업가인 윤장섭씨를 떠올린 것이다.(최순우씨는 훗날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내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쓰게 된다. 황수영씨는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동국대 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고고미술>은 달마다 윤장섭씨의 사무실로 배달됐다. 고미술 분야에 문외한인 그였지만, 그 분야 전문가들의 글은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오래된 유물과 교감하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게됐고, 유물 한 점을 통해 수백년전 과거를 지금으로 초대하는 경험도 놀라웠다. 사업가 윤장섭씨는 그렇게 국가유산 수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고미술>은 미술사학자인 진홍섭씨를 만나는 연결고리가 되기도 했다. 진홍섭씨는 이화여대 박물관 관장이었다. 진홍섭,황수영,최순우씨 등 세 명은 윤장섭씨와 고향이 같았다. 이른바 ‘개성3인방’이 사업가 윤장섭씨를 국가유산의 세계로 초대한 것이었다.

초보 수집가 윤장섭씨는 편지로 국가유산에 대한 의견을나누기도했다.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윤장섭씨가 국가유산 전문가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200여 통, 그중 170여 통은 최순우씨와 나눈 편지였다. ‘몇 점 탁송하오니 품평앙망 하나이다.’ 최순우씨에게 보내는 편지첫머리다. 2~3일 간격, 2~3주 간격, 많을 때는 하루에도 두세 통씩 편지가 오갔다. 일터가 가까워서 사람을 통해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윤장섭씨는 해가 갈수록 국가유산 수집의 길에 깊이 빠져들었다. 유물을 보는 눈도 깊고, 넓고, 예리해졌다. 그러는 동안 수집한 유물이 쌓였고, 1982년 대치동에 호림박물관을 열게 된다. 대치동 상가건물 3층을 임대해서 연 호림박물관의 시대를 뒤로하고 1999년 신림동에 박물관 건물을 지어 호림박물관 신림동 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9년 강남구 신사동에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을 열어 옛이야기를 품은 유물들이 사람들 속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서게 했다. 국보 8건, 보물 54건,서울시 유형문화재 11건 등 1만 9천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상설전시, 기획·특별전시 등을 통해 사람들을 국가유산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토기, 대지의 혼–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을 돌아보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1층 로비로 가는 길은 과거로 가는 시간의 통로이자 다른 세상과 연결된 은하수 반짝이는 밤길이다. 별빛으로 길을 찾고 대지에 의지해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 잠들어 있던 토기들을 전시한 ‘공경과 장엄을 담은 토기’ 전시가 6월29일까지 열린다.

2, 3, 4층 전시관 관람을 4층부터 시작한다. ‘공경을 담은 토기–항아리’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아주 먼 과거로 떠나는 여행. 죽음은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이라고 생각했다. 무덤은 죽음 뒤에 펼쳐지는 세상의 집이었다. 토기와 철기, 장신구 등 살아서 쓰던 물건들을 무덤에 함께 묻었다. 가야와 삼국시대의 항아리들, 장신구가 전시된 공간은 아주 오래 전 죽음 뒤 세상을 현재로 초대한 예의로 엄숙했다.

금은동제 장식품들, 귀걸이, 목걸이, 팔찌, 금관 등은 반짝였지만 슬프지 않았다. ‘말 장식 뿔잔’과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는 모습의 토우들은 살아 놀던 흥을 죽음 뒤에 펼쳐지는 세상에서도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3층 제2전시실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어둠속에서 빛나는 유물 한 점에 숨을 멈춰야 했다. 본능적으로 카메라 초점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피사체에 맞추고 숨을 멈춘 뒤 셔터를 눌렀다. 4세기에 만든 원통 모양 그릇받침이었다. ‘장엄을 더한 토기–원통 모양 그릇받침’ 관람은 그렇게 시작됐다.

벽 쪽 진열대 공간을 지나면 전시 공간 전체에 종횡으로 줄을 맞춰 전시품을 진열한 공간이 나온다. 그 자체로 장엄하다. 전시물이 유리에 비쳐 공간이 확장돼 보인다. 천장의 작은 조명들이 밤하늘 별빛 같다. 그 빛 아래 놓인 토기들은 대지의 흙을 일구어 빚은 살아있던 날들의 생활이며 죽음 뒤의 세상을 밝히는 혼 같았다. 그 앞에서 대가야, 소가야, 삼국시대 등의 설명글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어떤 토기에 빚어진 강아지, 사람, 오리, 개구리 등의 토우들이 장엄 속의 해학이었다.

2층 전시실에 전시된 ‘위엄을 담은 토기–화로 모양, 바리 모양 그릇받침’을 뒤로 하고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박물관 건물 옆 15층 호림아트센터 오피스동 건물 외벽에서 빗살무늬들이 빛나고 있었다.

도자기와 금불상, 그리고 19세기 평양성도를 보다-신림동 호림박물관

토기는 신림동 호림박물관 1층 전시관에서도 볼 수 있다. 기원전 5~4세기에 만든 ‘가지무늬 토기’와 ‘붉은 간 토기’가 전시관 초입에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삼국시대인 5세기에 만든 ‘배 모양 토기’는 당시 항해하던 배를 본떠 만든 것이란다.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서 주로 발견된다고 하는데, 죽은 사람의 혼을 싣고 죽음 이후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배란다. 고대 선박 형태와 당시 항해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고 한다. ‘집 모양 토기’는 아홉 개의 다리 위에 집을 지은 모양이다. 청동기시대~삼국시대의 주거지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가옥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며, 농업 발달과 함께 잉여 생산물을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는 설명이 붙었다. 처음보는 토기에 박물관이 새로워진다.

2층 전시관은 고려청자로 전시가 시작된다. ‘청자 침형 병’ ‘청자 음각 연화문 매병’ 등 으로 눈길을 옮기다 ‘청자주자’에서 눈길을 멈춘다.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복숭아를 닮은 청자연적, 새를 탄 스님 모양의 연적 앞에서도 오래 머물렀다. 청자의 시대에서 백자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만들어진 ‘분청사기 박지 태극문 편병’은 보물로 지정됐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백자대호’는 잘 알려진 ‘달항아리’다.

보물로 지정된 14세기 고려시대 ‘금동 대세지보살 좌상’도 볼 수 있다. 6세기 삼국시대의 ‘금동여래입상’, 7세기 ‘금동반가사유상’ 등은 작지만 기품이 묻어난다. 독립된 공간에 홀로 전시된 13세기 ‘금동소탑’은 빛과 어둠의 조화를 한 몸에 담아 기원의 신성을 북돋운다.

19세기 평양성도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모란봉과 대동강, 능라도에서 벌어지는 판소리 공연, 부벽루와 을밀대, 사람들이 모여 석전놀이를 하는 모습 등이 그림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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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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