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한국 가요에 격조를 더하다

인기 절정에 갑자기 은퇴해 화가의 길, 37년 만에 컴백한 정미조

등록 : 2018-09-13 15:17 수정 : 2018-09-2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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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서양화과 출신으로

1972년 데뷔해 79년 은퇴

프랑스 유학해 본업인 화가로

풍부한 성량과 우아한 창법으로

‘개여울’ 등 대중가요 품격 높여

2016년 컴백해 내놓은 CD 앨범은

격조 높은 보컬과 뛰어난 완성도로

왜 정미조인지 증명해


최근 500장 한정 LP로 발매돼

정미조 주한외국대사부인모임 파티 공연 1975년.

이화여대 미대 서양화과 출신으로 화제를 모으며 등장했던 정미조는 인기 절정의 순간에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하며 본업인 화가의 길로 돌아갔던 독특한 이력의 가수이다. 정미조의 사진으로 커버가 장식되거나 그의 노래만으로 구성된 LP는 1972년 데뷔부터 1979년 은퇴까지 총 13장에 이른다. 팝 스타일의 노래가 주를 이루고 캐럴과 세계 가곡 음반까지 포함된 그의 LP들은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 음반이 되었다. 그중 신중현 곡 ‘고향’을 노래한 음반과 <세계 가곡집> LP가 가장 희귀하다.

신인 가수 선발경연대회 트렌드 발화

정미조는 초등학교 시절 화려한 발레리나를 꿈꿨다. 중학교 때는 교내외 무용 대회와 그림 대회에서 입상을 독차지하며 화가의 꿈이 생겨났다. 배화여고 교내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는 막연하게 가수의 꿈도 품었다. 1968년 이화여대 서양화과 신입생 장기자랑 무대에서 시원한 창법으로 팝송을 노래한 정미조는 단숨에 교내의 실력자로 소문이 났다. 이에 20명으로 조직된 파월 장병 위문 공연단에 선발되면서 졸업 전부터 음반 제작 제의가 밀려들어왔다. 이에 잠시 본업인 화가의 길을 접고 가수 데뷔를 결심했다.

1972년 3월, 졸업과 동시에 동양텔레비전방송(TBC TV)의 <쇼쇼쇼>에 출연해 시원한 성량과 울림이 큰 노래 솜씨를 뽐냈다. 이후 피아트 승용차를 상품으로 건 서바이벌 노래 경연이었던 한국방송(KBS) TV의 <신인 가요제>에서 우승했다. 동아방송(DBS)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는 10주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각 방송사에 다양한 신인 가수 선발대회 프로그램의 활성화를 불러왔다. 1972년 7월 아세아레코드사 전속 기념으로 가요와 번안곡으로 구성된 데뷔 음반을 발매했다.

패티김을 이을 대형 가수로 주목

정미조는 음반 발매 전부터 이화여대 미대 출신이라는 학벌 프리미엄에다 170㎝의 큰 키와 시원한 이목구비로 ‘오디오와 비디오를 겸비했다’는 평을 받으며 패티김을 이을 대형 가수로 기대감을 높였다. 무엇보다 이희목이 작곡하고 1922년 월간 <개벽>에 김소월이 발표한 시를 가사로 사용한 그의 대표곡 ‘개여울’은 “소월의 시가 50년 만에 대중가요로 탄생했다”고 언론에 소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사실 ‘개여울’은 1967년 KBS 전속가수 김정희가 이미 발표한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다. 김정희의 원곡이 꾸밈없이 순수한 분위기라면, 5년 뒤 발표된 정미조 버전은 저음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가창력과 호소력으로 대중에게 어필했다. ‘개여울’의 큰 히트로 문화방송(MBC) 신인 여가수상을 받았던 정미조의 데뷔 음반은 일찌감치 다 팔려 재발매됐을 정도로 히트작이었다.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된 정미조

인기가 높아지자 집안에서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주간지 <주간여성>에 “가수 정미조와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깊은 관계”라는 스캔들 기사가 실린 것. 집안 어른들에게 ‘스캔들을 내지 않겠다’ 약속하고 가수 활동을 시작했기에 난리가 났다. 하지만 스캔들 기사 이후 정미조에게는 대중의 관심이 더욱 집중되었다. TV 출연만 한 달에 28회를 기록했고, ‘파도’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 후속곡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1976년 MBC 10대 가수에 선정되며 최정상 가수가 되었다.

많은 대중문화인이 활동금지에 신음했던 1975년에 정미조도 자유롭지 못했다. MBC의 <금주의 인기가요>에서 정상을 차지했던 이장희 곡 ‘휘파람을 부세요’와 젊은 층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 송창식의 곡 ‘불꽃’까지 금지곡으로 묶였다. ‘불꽃’은 정당한 금지 사유가 없었다. 당시에는 빨간색 이미지가 강한 노래는 무조건 금지되던 반공의 시절이었다.

제9회 야마하 동경국제가요제에서 수상

정미조는 금지의 아픔을 딛고 1978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9회 야마하 동경국제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김기웅의 곡 ‘아! 사랑아’를 열창해 우수가창상을 받은 정미조는 대중가수로서 꿈꾸었던 모든 영광을 이루면서 미뤄둔 화가의 꿈이 되살아났다. 1979년 10월, 갑자기 은퇴와 유학 선언을 했다. 인기 절정의 순간 프랑스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떠나기 위해 정미조는 미련 없이 가수 활동을 접었다. 갑작스런 은퇴 선언은 많은 팬에게 충격을 주며 화제가 되었다. 동경국제가요제가 막을 내리고 한 달 뒤 12월 힛트레코드에서 정미조의 수상 기념 음반이자 고별 음반이 나왔다.

정미조 야마하국제가요제 본선 열창 모습. 1978년(왼쪽). 화가 정미조가 그림 그리는 모습. 1995년(오른쪽).

37년 만에 격조 높은 음악으로 컴백

수원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대중음악계와는 거리를 두었던 정미조는 이따금 그림 전시회 때 노래를 선보였고, 2006년에는 베스트 시디(CD)까지 발매해 컴백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결국 정미조는 은퇴 선언 37년 만인 2016년 컴백했다. CD로 먼저 공개된 신작 앨범 2장은 최근 500장 한정 LP로 발매돼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2016년 컴백 앨범 ‘37년’은 정미조의 격조 있는 보컬과 뛰어난 완성도로 팬들과 평단의 극찬을 끌어냈다. 이 앨범은 왕년의 유명 가수들이 컴백하며 보여준 음악적 구태의 재현이 아닌, 월드뮤직과 재즈 어법을 적극 수용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음악적 도전과 실험을 보여준 2017년 작 ‘내 젊은 날의 영혼’에서도 정미조는 라틴, 팝 재즈, 모던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우아한 창법으로 들려준다. 두 앨범은 최근 발매되는 대중가요 LP 중 최상급의 매력적인 음질을 구현해 화제를 모았다. 게이트 폴드 팁온 슬리브(펼침 양장)로 제작된 재킷도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최근 유행을 주도하는 컬러반의 유혹을 떨쳐내고 블랙반으로 제작한 것은 좋은 음질을 위한 제작자의 고집스러운 선택이다.

1972년부터 2018년까지 발매한 정미조 LP 15장.

자칫 무모해 보이는 이 모든 시도는 수익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삼는 제작자 이주엽의 고집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뛰어난 작사가이기도 한 그가 운영하는 음반사 JHN은 왕년의 인기 가수로만 머물 수 있었던 최백호를 뛰어난 월드뮤직 보컬리스트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정미조도 신작 2장 앨범으로 격조 있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부활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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