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공기관에 전시된 ‘빽판’, 시민권 얻다

‘빽판’의 시대, ‘빽판’의 추억 上

등록 : 2018-10-04 16:23 수정 : 2018-10-0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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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의 유물

명백히 불법이지만

대중음악의 자양분 역할도

50~60년대는 정식 레이블도

해적판 제작

국내 음악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서양 미녀 사진 재킷 빽판들.

음반사가 적혀 있지 않았던 ‘백반’

오래전 음악감상회를 하던 중에 “지금은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빽판’도 귀한 자료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 청계천박물관에서 ‘빽판의 시대’ 전시(포스터)를 의뢰받아 준비하면서 농담처럼 했던 말이 현실로 다가왔음이 느껴져 묘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전시 개막 행사에서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공공기관에서 빽판을 전시하는 오늘은 혁명과도 같은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빽판, 즉 해적판은 하얀 음반 라벨에 제작사가 표기되지 않은 ‘백반’(白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음반 판권 소유자와 라이선스(사용권) 계약 없이 만들어 유통한 불법 음반을 말한다. 은밀히 뒤에서 제작되어 ‘Back’이란 말을 썼다는 설도 있다.

한국전쟁 후 미군의 본격 주둔과 더불어 물밀듯이 유입되었던 다양한 서양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을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한미군방송(AFKN)으로 팝송을 들었던 젊은 세대는 아무 때나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국내 음반업계는 정식 사용권 계약 없이 클래식, 팝송, 재즈 등 다양한 서양 음악을 무차별 제작해 유통하기 시작했다.

시대별 빽판의 유통 과정

빽판은 외국에서 제작한 원판의 음원을 불법 복사했기에 기본적으로 정식 녹음 음반과는 음질부터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전쟁 후 원판들은 유학생들이 들여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국 각지에 주둔했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왔다. 미군기지에 근무했던 한국인 군속과 기지촌 성매매 여성 ‘양공주’를 통해 원판 싱글과 음반 LP들 그리고 각종 미군 피엑스(PX) 물건을 수집해 유통한 음성 조직들이 성업했다.

어느 시대나 해적판으로 제작된 노래들은 당대 가장 인기 있던 가수나 밴드 노래들의 음악 그리고 유행했던 음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50~60년대에는 지구, 오아시스, 도미도 등 정식 레코드사에서도 해적판을 만들었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시기였고 붕괴 직전의 음반 시장을 재건하는 일이 급선무였기에 해적판은 큰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당시 발매된 해적판 라벨에 당당하게 납세필증까지 붙이는 해프닝까지 연출했다. 검열 기관도 노래와 커버 이미지가 미풍양속 등 검열 기준에 위배되는지만 살폈다.

50년대부터 70년대 초반 제작된 해적판은 재킷 디자인에 상당한 공을 들였기에, 70년대 중반 이후 조악한 단색 재킷으로 인쇄한 빽판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1968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음제작소가 정식 사용권 계약을 맺고 음반을 제작하며, 70년대 들어 정식 음반사들은 해적판 제작을 중단하고 라이선스 음반 제작으로 전환했다. 그 긍정적인 순간은 제작사가 표기되지 않은 빽판 제작이 활개 치는 계기가 되었다.

시대별 각종 댄스 빽판들.

나를 음반 수집으로 이끈 빽판의 추억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973년 12월 어느 날, 동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동글납작한 검은 물체에서 흘러나오는, 내겐 인생의 음반인 영국 밴드 딥 퍼플(Deep Purple)의 ‘하이웨이 스타’(Highway Star)를 듣게 된다. 그때까지 들었던 대중가요와는 사뭇 다른 강렬한 노래는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검은색 동그란 물체는 불법으로 제작된 빽판이었다. 팝송에 전율을 느낀 이후 LP 수집을 시작한 소년은 음반수집가로 성장했다. 당시 내가 살던 상도3동에서 노량진역까지에는 10개가 넘는 음반가게가 성업했다.

‘하이웨이 스타’가 들어 있는 딥퍼플의 빽판.

빽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뒤, 수업이 끝나면 동네 음반가게들을 매일같이 순례했다. 동네 음반가게마다 파는 음반이 조금씩 달랐다. 클래식 음반도 인기가 있었지만 가요 음반과 팝송 ‘빽판’을 파는 곳이 가장 많았다. 금발의 외국 여성 사진으로 장식된 팝송 빽판들은 음반가게 진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젊은 영혼들을 사로잡았다. 70년대 대유행했던 ‘다이아몬드 스텝의 고고 춤’을 출 수 있는 신나는 팝송들이 대거 수록된 빽판은 가장 잘 팔렸던 인기 상품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해 비틀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 벤처스 등 밴드의 음반도 인기가 대단했다.

동네 음반가게는 물론이고 서울 도심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음반가게에서도 빽판은 버젓하게 진열대 한 자리를 차지했다. 동네 음반가게들은 대부분 신보로 나온 최신 팝송들이 수록된 빽판만 팔았다. 더 많은 음악에 목말랐던 까까머리 소년은 단골 음반가게 사장님에게 “세운상가에 가면 싼값에 다양한 빽판을 살 수 있다”는 솔깃한 정보를 들었다. 주말이 되면 청계천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나는 근사한 외국 음악이 담긴 빽판을 찾아내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세상의 모든 음악 집결소 청계천 세운상가

살뜰하게 모아둔 용돈을 가지고 청계천에 가는 날은 사냥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청계천에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 다 있었다. 청계천 4가에는 ‘빽판’을 파는 도매상과 소매상들이 밀집해 있었다. 청계천 8가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비싼 ‘원판’들을 음성적으로 팔았다. 단속이 들이닥칠 것 같은 불안한 분위기에서 빽판을 뒤적이던 추억이 떠오른다. 빽판은 라이선스 음반의 10~20% 이내의 싼값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청계천을 찾은 청소년들은 빽판 재킷을 화려하게 장식한 금발의 서양 미인 사진에 홀려 아낌없이 용돈을 꺼냈다. 빽판의 재킷 사진들은 미군들이 즐겨 보던 각종 해외 오락 잡지 등에서 발췌했다고 한다.

값이 싼 만큼이나 빽판은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음반 몇 장을 구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70년대 빽판의 재킷은 조악한 종이로 제작해 쉽게 훼손되었다. 그래서 물자가 넉넉지 못했던 당시에 귀했던 두툼한 청색, 녹색 테이프로 테두리를 테이핑한 빽판은 자랑거리였다.

청계천박물관 빽판의 시대 전시 포스터.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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