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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 혜원처럼, 번아웃된 나를 치유하다

등록 : 2018-12-20 15:59 수정 : 2018-12-2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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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한국임업진흥원의 ‘산촌으로 가는 청년’

2030 20명, 사계절 어울려 일하며 요리하며 힐링

첫눈이 온 11월24일 오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 옻샘 마을에서는 산림청과 한국임업진흥원의 사계절 산촌살이 체험 프로그램 ‘산촌으로 가는 청년‘ 수료식이 열렸다. 참가한 청년들은 수료식이 끝난 뒤 눈싸움을 하며 눈 내린 산촌의 정취를 만끽했다.

잣나무 숲을 병풍 삼은 하얀 눈밭의 구릉에서 청년들이 눈싸움을 한다. 도시에서 보지 못한 새하얀 눈에 감탄하며, 모두가 동심으로 돌아가 신나게 논다. 청년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깊은 산골에 퍼져간다.

지난 11월24일 첫눈이 펑펑 내리던 날,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 옻샘 산촌에서는 작은 행사가 열렸다. 사계절 산촌살이 체험 프로그램 ‘산촌으로 가는 청년’(산촌청년)의 수료식이다. 폭설을 뚫고 어렵게 수료식에 참여한 청년들은 돌아가며 소감을 말했다.

4월21일 발대식을 한 뒤 채소 키울 밭을 찾아 생태산촌 이정민 사무처장의 설명을 들었다.

산촌살이가 탈진(번아웃)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준 ‘소독약’이었다는 김은진(27)씨의 발표에 모두 ‘격하게’ 공감하며 힘찬 박수를 보냈다.

김씨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이와 비슷하게 도시 생활에 번아웃이 되었는데, 자연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게 값진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회적 잣대로 나를 힘들게 하지 말자. 나는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사람이다’ 하는 자존감이 생겼다”고 한다.


5월26일 모판 실은 차를 타고 마을 모내기 일손 돕기에 나섰다.

수도권에 사는 청년 20명이 올 한 해 평일이나 주말 틈나는 대로 머물며 산촌살이를 했다. 산촌청년 프로그램은 산림청과 한국임업진흥원이 시민단체 ‘생태산촌’과 함께 연 첫 사업이다. 생태적 삶에 관심 있는 도시 청년들이 모여 함께 경험하며, 지친 도시 생활에서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획했다. 60여 명이 응모해 면접으로 20명을 뽑았다. 수도권에서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산촌의 빈집을 빌려 청년들이 지낼 공간과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기본 시설을 갖춰주고, 작물을 키울 밭도 마련했다.

산촌청년은 개방형 프로그램으로, 참여자들이 직접 활동을 계획하고 실천한다. 회장을 맡은 윤인식(30)씨는 “주입식 교육으로 대부분 주어진 걸 따르는 데 익숙해 처음엔 개방형 커리큘럼이 낯설었지만, 무리하지 않고 의견을 얘기하며 조율했다”고 한다. 생태산촌의 이정민 사무처장은 “경쟁이 아니고 어울려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라 참여자들을 믿고 맡기니 서로 배려하며 잘 진행했다”고 전했다.

6월9일 마을 주민들과 함께 김치를 담그려고 열무를 다듬었다.

청년들은 ‘재밌는 산촌살이’를 콘셉트로 정했다. 농사일 경험도, 노는 것도, 먹는 것도 모두 재미있게 해보려 했다. 상추, 열무, 고추 등 10여 가지 채소를 조금씩 길러보고, 잘 키워 팔아보겠다는 야심 찬 목표도 세웠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tvN 예능 프로그램 <삼시 세끼>에서처럼 밭에서 갓 따온 재료들로 요리해 먹기, 키운 배추로 김장하기도 넣었다. 여름엔 냇가에서 물놀이와 고기잡이를 하고, 모내기 등 마을 일손을 돕는 활동도 곁들였다.

참여자들은 퇴사하고 새 일을 찾는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직장인이었다. 나이는 23살부터 37살까지 다양했다. 나이와 하는 일은 서로 묻지 않았다. 서로 ‘○○님’이라 부르며 존댓말을 썼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편하게 대했다. 누가 일을 더 많이 하고 덜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스스로 하는 일이다보니 그저 마음 편히 즐겁게 지내면 될 뿐이었다. 활동 내용은 네이버 밴드에 올려 공유했다.

10월13일 밭에서 팔뚝만 한 고구마를 줄줄이 캐냈다.

11월17일 직접 기른 배추 80포기를 절여 김장을 담갔다.


땀 흘려 기른 채소로 요리, 최고의 단맛

<리틀 포레스트> <삼시 세끼> 따르기도, 폭염 속 일하며 농사 힘듦도 느껴

사계절을 지낸 청년들이 꼽은 산촌살이 ‘최고의 단맛’은 땀 흘려 기른 채소로 요리해 먹은 것이었다. 열무를 키워 열무김치를 담그고, 상추·파·고추로 비빔밥, 비빔국수, 수제비 등을 해 먹었다.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이재아(27)씨는 “다 함께 요리를 하니 맛이 더 좋았다”며 “햇빛과 흙, 사람의 땀이 더해져 먹거리의 소중함을 더 많이 느꼈다”고 한다. 농·임산물 상품 기획에 관심 있는 김은진씨는 “쌉싸름한 열무를 김치로 담가 수육과 먹을 때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고 한다.

3년간 다녔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해보고 싶어 새 길을 찾아나선 윤인식씨는 “두릅을 따 즉석에서 데쳐 먹고, 아욱된장국도 끓였다”며 <삼시세끼>를 따라서 많이 했단다. 농기계 회사에 다니며 귀농을 계획하고 있는 유일한 기혼자 김호겸(37)씨는 “직접 반죽해 만들어 먹은 수제비는 가장 산촌다운 음식으로,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청년들이 6월 초 갓 딴 고추와 상추, 쑥갓을 넣어 비빔국수를 만들었다. 시민단체 ‘생태산촌’ 제공

단맛이 있으면 쓴맛도 있는 법, 올여름 폭염 속에서 일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 평소 활달하고 트로트 ‘자옥아’ ‘분위기 좋고’ 등을 ‘노동요’로 즐겨 부르던 김은진씨도 “농사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비닐을 한 줄 깔다가 ‘천연 돌침대’에 누워버렸다”며 웃었다. 야심 차게 기획했던 옥수수 아이스크림은 100여 알 뿌린 옥수수가 아예 자라지도 못해 물거품이 됐다. 김호겸씨는 “그냥 씨 뿌리고 모종 심었다고 잘 자라는 게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고 한다.

더위가 한풀 꺾인 초가을엔 왕까마중 상품화에 도전했다. 한알 한알 정성스레 따고, 깨끗이 씻어 말리고 꼭지를 다듬었다. 생과, 분말, 잼으로 나눠 만들었다. 산촌청년의첫 작품을 알리기 위해 용기를 만들어 스티커도 붙였다. 가평 유명산 로컬푸드 매장에서 팔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만큼 수익이 나지 않아 실망도 컸다. 환경단체에서 일하다 중소기업에 취업한 최성용(29)씨는 “체험이 아닌 생업이라 생각하면 인건비, 재료비도 남지 않아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청년들은 자신이 산촌살이의 최고 수혜자라고 앞다퉈 말한다. 그만큼 각자 얻은게 많았던 경험이었나보다.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한 ‘징검다리’,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한 ‘변곡점’ 등 산촌살이는 개인마다 조금씩 다른 의미이기도 했지만 모두가 입 모아 말하는 게 있다. 바로 ‘힐링’이다. 자연 속에서 어울려 일하고, 먹고, 놀며 서로를 보듬어안은 따뜻한 경험이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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