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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부모, 조부모가 겪었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살아서
우리들의 가슴을 울린다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전시실.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라는 주제로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됐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관련 문서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몰랐던 일제강점기의 역사, 잊힌 사람들, 낱낱의 일들에 대한 기록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었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따뜻한 체온으로 살아 사람들 마음을 울린다.
강제징용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용산구 청파동2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전시관 벽에 적힌 글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일제강점기에 일본, 중국, 동남아, 남양군도, 러시아 사할린 등의 전쟁터로, 탄광으로, 공장으로, 공사장으로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에서 숨져갔던 사람들과 그들 가족 이야기에 가슴이 저민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걱정에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동생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던 이아무개씨의 그때 나이는 11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44년에 군속(군무원)으로 남태평양에 강제 동원된 뒤 1945년 팔라우에서 사망했다.
1944년에 강제징용되어 오키나와로 끌려갔던 아버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학교도 못 다니고 공사판을 전전하며 살면서도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실 것 같아 사망신고도 못하다가 1996년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됐다는 기록을 찾은 권아무개씨는 아버지가 끌려간 오키나와에 가서 아버지 제사를 올렸다.
박물관 1층 벽에 전시된 유족들이 남긴 글과 기증한 문서와 기록 등을 하나하나 읽는다. 일본 해군이 1950년 후반에 쓴 일본 해군 ‘군속신상조사표’는 강제동원한 조선인 약 7만9천 명의 기록을 담고 있다. 1971년 일본 정부로부터 인수한 피징용 사망자 연명부에 육군과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됐다가 사망한 2만1692명의 이름이 실렸다.
그리고 전시장에 놓인 빈 상여 하나, 2011년 5월8일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은 망향의 동산에서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주검도 유골도 없는 텅 빈 상여에 남은 이들의 애끓는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을 대신 담았다는 글귀가 마음을 울린다.
일제 침략으로 전쟁터가 된 아시아태평양
박물관 2층 상설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한 시대 다른 삶친일과 항일’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네 주제로 마련한 4개의 전시 공간은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끝나지 않은 역사를 말해준다.
‘19세기는 야만의 시대였다’로 시작하는 안내글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에 대해 알려준다. 전시장에 걸린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리가 권위를 과시하고자 차던 칼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과 관련된 주요 인물과 사건들을 그려넣은 주사위놀이판도 볼 수 있다. 1894년 7월23일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며 경복궁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그린 그림도 전시됐다. 청일전쟁 주사위놀이판도 있다. 육군은 히로시마에서, 해군은 나가사키에서 출발해 베이징에 먼저 도착하면 이기는 놀이다.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우리나라와 주변국을 전쟁 놀이터로 생각했던 셈이다.
고대부터 강제병합까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주요 인물과 사건들을 그려넣은 주사위놀이판.
청일전쟁 주사위 놀이판.
‘조선에 온 일본군, 강과 들을 붉게 물들이다’라는 제목 아래 사진 몇 장이 있다. 일본군에 총살당한 의병들의 모습이 보인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 활동이 활발해졌다. 의병을 진압한 공로로 받은 하사금 수여증이 같은 전시 공간에 놓였다.
친일파 양성책도 소개한다. ‘양반과 유생 중 직업이 없는 사람들에게 생활 방도를 만들어주고 선전과 정탐에 이용한다. 조선 부호에게 일본 자본을 연계 맺도록 해서 일본 측으로 끌어들인다. 민간 유지에게 편의와 원조를 해주고 농촌 지도에 노력케 한다.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친일적 지식인을 대량으로 양성한다.’ 등의 항목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는 수탈을 일삼았다. 오사카로 반출하는 쌀을 검사하는 사진, 압록강 유역에서 벌목한 통나무를 옮기는 사진에서 수탈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일제는 한 집에 보리쌀 한 되씩 모아 바치기, 매월 1전씩 모아 바치기 같은 강제 모금부터 가마니와 개가죽, 돼지가죽까지 수탈했다고 한다.
친일과 항일의 역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친일과 항일의 역사가 전시관 양쪽 벽에 걸려 있다. 을사5적, 정미7적, 경술국적으로 비난받는 이들을 포함해 68명이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 공채를 받았다. 그 작위와 재산은 후손에게 세습됐다. 1930년대 들어서 문화지식인들의 친일 행위가 노골적이 된다. 조선인을 침략전쟁에 참여시키는 데 앞장섰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다.’ 친일의 인물과 역사를 적은 글 앞에 어떤 의병의 말이 붙어 있다.
3·1독립선언서 초판 옆에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국경을 넘은 15살 소년의 이야기가 있다. 님 웨일스가 쓴 독립운동가 김산의 이야기 <아리랑> 중 한 대목을 옮겨놓은 것이다.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을 맡은 지청천 장군 이야기도 보인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관련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체포되자 차리석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도산 선생의 체포 경위와 일생을 중국어로 써서 펴낸 도산 선생 약사도 전시됐다.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24일 대한애국청년당의 조문기·류만수·강윤국이 일본의 침략전쟁에 조선인들을 동원하기 위한 행사가 열리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장’을 폭파한 마지막 의거도 확인할 수 있다.
친일과 항일의 역사를 보고나면 정리하지 못한 일제 잔재와 바로잡아야 할 일들이 전시된 공간을 만나게 된다. 그 중심에 <친일인명사전>이 놓여 있다. 일제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60년 만인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됐다. 전시관 한쪽에 임종국 선생 유고 중 일부를 적어놓았다.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匡正)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을 다 돌아보고 나오는 곳에 놓인 방명록.
박물관에서 나와 보니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친다. 이대로 돌아가기에 거리에 생기가 넘친다. 400~500m 거리에 있는 효창공원으로 걸었다. 임정 요인 묘역, 백범 김구 묘역, 삼의사 묘역 등 박물관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을 거닐었다. 삼의사 묘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1910년 3월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고자 만든 빈 무덤이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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