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소식

마을도서관과 문화공간으로 확 바뀐 ‘나쁜 카페’ 골목

영등포구, ‘당산골 문화의 거리’ 사업 성과…6개월만에 유흥카페 12곳 사라져

등록 : 2019-11-1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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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경찰·주민 합동 캠페인 진행

청년예술가가 점포 인테리어 바꿔줘

유흥주점 떠난 곳에 도서관·주민공간

주민들 “이제 살고 싶은 동네로” 다짐

당산1동 ‘나쁜 카페’가 떠난 자리에 만들어진 ‘책나무 마을도서관’에서 9일 오전 아이들이 동화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여우’ ‘미미’ ‘블루’ ‘로망’…. 알 듯 말 듯 한 이름들이 적힌 간판을 보면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자, 네거리 모퉁이 건물 1층에 ‘당산골 행복곳간’이 보였다. 실내에서는 자원봉사를 나온 강사와 주민 5명이 열심히 꽃꽂이 수업을 하고 있었다. 8일 영등포구 당산1동에 있는 ‘당산골 행복곳간’ 1호점을 찾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소위 ‘나쁜 카페’가 있던 자리였다. ‘나쁜 카페’는 밀폐형 유흥주점으로 주택가 분위기를 어둡게 만드는 ‘주범’으로 주민들 원성이 높다.

‘나쁜 카페’는 15년 전부터 하나둘 당산로16길 일대로 모였다. 이 동네 토박이로 ‘금풍떡방’을 운영하는 이청노씨는 “당시 플라스틱 가게가 많았는데 하나둘 문을 닫고 빈 가게가 생겨나자 술집이 이사를 왔다”고 했다. 이씨는 “2005년께 20여 곳이나 생겼다”고 덧붙였다.

주민들 대부분은 유흥주점 종사자들이 여름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동네를 다니기 민망하고 어린 자녀들 보기에도 부끄럽다고 했다.

“밤에는 나이 먹은 어른들이 봐도 불빛도 이상하고 옷 입는 것도 이상한데, 아이들 눈에는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요.”

‘당산골 행복곳간’에서 꽃꽂이를 배우는 김덕화(65)씨는 “그동안 구청에도 건의를 많이 하고 야간 순찰도 했지만 건물 주인들이 임대를 주니 어쩔 도리가 없더라”고 했다.

영등포구는 이런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구는 올해 초부터 ‘나쁜 카페’를 퇴출시킨 자리에 동네 예술가와 주민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당산골 문화의 거리’ 사업을 추진 중이다. 유흥업소가 나간 건물에 주민 커뮤니티 공간, 도서관, 사회적기업 등을 입주시켜 그동안 ‘칙칙했던’ 거리 분위기를 밝고 생동감 넘치는 곳으로 만드는 계획이다.

구는 지난 6월 폐업한 유흥업소 3곳이 있던 곳을 빌려 주민들의 체험 커뮤니티 공간인 ‘당산골 행복곳간’ 1, 2호점과 주민 공유 공간인 ‘당산 탁트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당산1동 ‘나쁜 카페’가 떠난 자리에 만들어진 ‘책나무 마을도서관’에서 9일 오전 아이들이 동화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영등포구는 10월1일 ‘책나무 마을도서관’을 열었다. 다락방, 테이블, 쿠션의자 등을 갖추어 주민들이 책을 보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구는 앞으로 나쁜 카페가 있던 두 곳을 추가로 임차해 만화카페형 마을도서관을 만들 계획이다. 오종선 ‘책나무 마을도서관’ 사서는 “주민들 관심도 많아졌고, 무엇보다 칙칙했던 동네 분위기가 바뀌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당산골 행복곳간’에서 취미활동을 하는 토박이 박명자(67)씨도 “어두웠던 거리가 밝아지는 것 같다”며 마을의 변화에 무척 기뻐했다. 그는 “한글을 배우는 손자가 주점 상호를 줄줄 읽을 때 상당히 난감하더라”며, 하지만 “구청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어둡고 위험한 거리에서 조금씩 밝은 거리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고 반겼다.

젊은 주부인 김민지(32)씨는 지난해 8월 결혼하고 이곳에 신혼집을 구했다. 그는 “환경이 이 상태에서 바뀌지 않으면 이사를 갈까 생각 중이었는데, 다행히 점차 좋아지고 있어 좀더 두고 봐야겠다”고 했다.

3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온 전소연(48)씨도 “주부와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환경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최근의 마음을 전했다. 전씨는 “이곳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 불안하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러나 당산골 행복곳간이나 도서관이 생긴 뒤로는 동네 이미지가 바뀌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당산골 행복곳간’과 ‘책나무 마을도서관’이 나란히 있는 모습.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영등포구는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밤 10시부터 자정 사이에 구청과 주민센터, 경찰, 주민이 함께 야간 캠페인을 진행했다. ‘나쁜 가게’가 밀집해 있는 골목길을 다니며 “아이들이 밝은 거리에서 뛰어노는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했다. 주민들의 호응은 좋았지만 ‘나쁜 카페’ 업주들은 ‘손님 떨어진다’며 싫어했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3월 41곳이었던 ‘나쁜카페’는 12곳이 사라져 11월 29곳으로 줄어들었다.

주민들도 이런 변화에 “구청장님 공약이었는데, 이제 해결되나보다”라며 무척 반기고 있다. ‘당산골 행복곳간’에서 꽃꽂이 강사로 자원봉사를 하는 공정분(66)씨는 “이대로만 가면 술집이 점점 없어져 좋을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구는 9월부터 연말까지 ‘나쁜 카페’ 골목의 오래된 점포를 새롭게 바꿔주는 ‘탁트인 우리동네가게 아트테리어’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문래창작촌의 청년예술가들이 이곳 점포 50곳을 대상으로 간판, 내부 디자인, 페인팅 등 인테리어를 비롯해 로고와 인쇄물 디자인, 마케팅까지 해준다. 가게당 최대 100만원의 디자인 개선 재료비도 준다.

영등포구는 지난 5일 당산동 문화의 거리가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떠남 현상)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건물주와 임차인 사이에 상생 협약도 체결했다. 밝은 거리 조성과 상권 활성화를 위한 정책이 자칫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지는 폐해를 미리 방지하고 지역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 방향을 만들기 위해서다. 협약서는 건물주는 임대료 인상 자제, 임차인은 쾌적한 영업환경과 거리환경 조성, 구는 당산골 상권 발전을 위한 기반 시설 구축과 환경 개선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네에서 자원봉사를 앞장서 하는 김경미(53)씨는 “이대로 가면 ‘나쁜 가게’가 없어져 좋은 동네가 될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제 이곳을 살고 싶은 동네로 만들어가야죠.”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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