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차지 남산 100년 만에 ‘한옥마을’ 돼 시민 품에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중구 필동 주변

등록 : 2019-11-2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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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일제의 주차군사령부 주둔

4년 뒤 ‘조선헌병대’가 옮겨오고

5·16 쿠데타 이후 수방사 세워져

1998년에야 한옥마을 민간 개방

조선총독부 2인자가 관저에서

8·15 때 여운형에게 치안권 넘길 때

무조건 항복 소식 몰랐던 김동인은

총독부 찾아 ‘친일 작가단 구성’ 밝혀


오늘은 일제강점기 이래 1960~70년대까지 부촌으로 알려졌던 중구 필동 일대를 돌아본다. 일제강점기 이곳이 부촌이 된 것은 인근에 조선총독부, 경성신사, 노기신사 등이 있어 이 일대가 일본인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충무로의 명칭은 혼마치(本町)로 경성의 가장 중심지였다. 해방되고 새롭게 가로명을 제정하면서 일본인들의 핵심 거주지였던 이곳 명칭을 일본을 크게 무찌른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서 충무로라 지은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해방 뒤 적산가옥이 많았던 이곳이 부촌을 이루게 된 것이다.

오늘의 산책은 충무로를 따라 걷기 위해 을지로3가역에서 출발하기로 하자. 여기서 퇴계로까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인도 곳곳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리'라는 블록을 깔아놓았다. 또 명보극장 앞에는 이곳이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표석도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생가 터는 약 200m 떨어진 곳(인현동1가 31-2)에 있다. 참고로 인현동이란 명칭은 조선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의 집이 있던 고개’라 하여 고개 현(峴) 자를 써서 ‘인현동’이 된 것이다.

명보극장 앞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 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약 200m 뒤다.(왼쪽) 1994년 정도 600년 기념으로 매설해 1천년이 되는 2394년 개봉하게 될 ‘서울 천년 타임캡슐’.

한편 충무로역에 도착하면 4번 출구에는 조선시대 이곳에 한성부 4부 학당 가운데 남학당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었으나 최근 사라졌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인근의 중부세무서 일대의 지명을 중구 남학동이라 정했다. 현재 남산골한옥마을 일대는 지명이 필동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한성부 5부 중 하나인 남부의 부청이 있어 부동(部洞)이라 했고 부동을 붓동으로 읽으면서 붓골이라고 칭하게 돼,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붓 필(筆) 자로 잘못 표기한 데서 유래했다.

이제 발길을 옮겨 전통문화복합공간으로 이용되는 ‘한국의 집'으로 가보자. 입구에는 이곳이 본래 사육신 가운데 한 명인 박팽년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알려줄 뿐 우리 현대사에서의 공간적 의미는 설명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이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가 있던 곳이다. 1945년 8월15일 낮 12시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에 앞서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아침 7시에 여운형과 이곳에서 만나 조선에 대한 치안권을 넘겨줬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역사 속 인물들은 참으로 다기다양했다. 정무총감에게 치안권을 넘겨받은 여운형은 해방된 조선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날 오전,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예상 못했던 소설가 김동인은 총독부로 찾아가 정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아마 그도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서정주 마음과 같았으리라. 이런 친일 행각을 한 김동인이지만,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이란 이름으로 현재에도 여전히 그를 기리며 수여하고 있다.

이제 남산골한옥마을로 발길을 옮겨보자. 이곳은 시내 중심부에 있음에도 우리 현대사에서 100년 가까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권력의 중심지였다. 1904년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차지했다가 4년 뒤 일본군은 용산으로 이전하고, 이곳에는 조선헌병대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해방 뒤에도 한국군 헌병대가 사용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1984년 수도방위사령부로 개칭)를 설립해 이곳을 사용하게 하였다. 이처럼 남산을 관통하는 삼일대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중구 필동과 예장동에 각각 수방사와 국가안전기획부라는 군부정권 속에서 최고의 권력기관이 남산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독재정권 시절 ‘남산’은 우리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던 곳이다. 1991년 수방사가 현재의 남태령으로 이전한 뒤 1998년 한옥마을이 조성되고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또한 1995년 예장동에 있던 안기부가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이제 남산 북측 사면은 온전히 일반인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용산 미군기지가 완전히 빠져나간 뒤 남산의 남측 사면이 온전히 우리에게 돌아왔을 때 남산의 자주적인 모습을 느끼리라 상상해본다.

이렇게 떠난 수방사의 터는 1998년 한옥마을이 조성돼 일반에게 공개된 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주요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옮겨놓은 한옥 5채 가운데 3채, 즉 옥인동 윤씨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이 각각 윤덕영, 민영휘, 윤택영이라는 골수 친일파들의 집이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한편 한옥마을 위로는 조선시대 이성계의 한양 천도가 이루어진 지 60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1994년 ‘서울 천년 타임캡슐'을 매설했다. 이것은 한양 천도 1천년이 되는 2394년에 개봉하기로 하였으며, 보신각종을 본떠서 만든 여기에는 우리 시대 모습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아기 기저귀, 담배, 팬티스타킹, 공무원 급여명세서 등 600여 점의 물품이 담겨 있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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