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술술 풀리길” 소원 빌며 도는 한양도성 40리

전유안 객원기자가 먼저 돌아본 새해 ‘순성놀이’

등록 : 2020-01-0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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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 보러 한양 온 선비들이

도성 돌며 과거 급제 빈 데서 유래

“비바람 쳐도 하루에 돌아야 효험”

북안·남산에서 본 서울, 한 폭 그림

푸른 소나무가 호위하는 인왕산 범바위 중턱 길. 지난 12월15일 오전 한 무리의 등산객이 순서대로 단단한 바위를 짚고 발을 내디뎠다. “동호회분들과 연말 모임 겸 등산 중이에요. 새해가 코앞이니까 성곽길 한 바퀴 걸으며 내년에도 일이 술술 풀리길 기원해보려고요.” 일행 끝에 선 정진숙(41)씨가 웃으며 말했다.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서 한 바퀴 걸으며 소원을 비는 일. 과연 오늘날 등산객들만의 재미였을까.

남산 팔각정 해돋이 행사.



한양도성 한 바퀴 돌며 소원을 빈 옛사람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 침입을 방어하고자 1396년 태조 때 축조된 성이다.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한양 사람들의 여가생활>에 따르면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에 도착한 선비들이 먼저 40리 가까운 도성을 돌며 과거 급제를 빌기 시작했는데, 이 모습을 도성 안팎에 사는 이들이 보고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를 ‘순성놀이’라 불렀다.

한양도성길 남산 구간.

당시 순성놀이의 핵심은 하루 동안 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비바람이 불더라도 하루에 마치지 않으면 효험이 없다”는 선비들 속설에서 기원했다. 훗날 종로에 자리 잡은 상인들도 개업한 상점의 번창을 기원하며 도성을 한 바퀴씩 돌곤 해서 ‘일종의 신앙’ 같은 놀이로 자리 잡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성곽길이 헐려나가는 동안 자연스레 기억에서 잊혔다.


2020년 ‘순성놀이’ 하며 새해 소원 빌어볼까

한양도성 복원사업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진행됐다. 지금은 약 18.6㎞ 길이에 이르는 ‘한양도성길’로 단장됐다. 걷는 방법도 다양하다. 그 가운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구간을 나눠 시간 날 때마다 한 구간씩 도전해보는 것이다.

보통 내사산을 중심으로 백악, 낙산, 남산(목멱산), 인왕산 구간 등 4구간으로 나누고, 여기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 숭례문 구간 2구간을 합쳐 6개 길을 걷는다. 전자는 별다른 지도가 필요 없이 성곽돌 따라 걸어가면 되지만, 후자는 약간의 상상력과 탐색 작업이 필요하다.

백악 구간(4.7㎞/ 약 3시간)은 창의문에서 시작해 숙정문, 말바위 안내소, 와룡공원을 지나 혜화문까지 이른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한동안 신분 확인을 통해 입산할 수 있었다. 현재는 탐방 절차가 간소해져 365일 편하게 입산할 수 있다. 단 동절기(11월~2월)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개방하며, 오후 3시 이후 입산은 어렵다.

낙산 구간.

낙산 구간(2.1㎞/약 1시간)은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른다. 경사가 완만해 편한 신발을 신으면 언제든 산책하듯 떠날 수 있다. 성곽돌들을 관찰하기도 좋아서 축조 시기에 따라 차이가 나는 돌 모양에 초점을 맞춰 보는 것도 재밌다. 24시간 개방하지만 늦은 밤에는 인근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배려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흥인지문 구간(1.8㎞/ 약 1시간)은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을 거쳐 장충체육관까지 이른다. 지대가 낮아 도성 안의 물이 여기 수문(오간수문·이간수문)으로 빠져나갔다는 곳이다. 일부 유구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전차 개설, 일제강점기에 도로 건설과 경성운동장 건설, 해방 후 도로 확장과 주택 건설 등으로 성벽 대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바닥에 그 흔적이 곳곳 남아 탐방하듯 걷는 것도 이 구간의 묘미다. 24시간 개방한다.

남산(목멱산) 구간(4.2㎞/ 약 3시간)은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남산공원까지 이어진다.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국립극장’ 구간 등 곳곳 끊어진 곳이 있으나 도성의 옛 자리를 바닥에 표시해둬 끊임없이 구간을 이어갈 수 있다.

숭례문 구간(1.8㎞/ 약 1시간)은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도심에서 진입이 쉽다. 성벽 대부분이 헐려 온전한 모습을 찾긴 어렵지만 밀레니엄 힐튼 서울, SK남산빌딩 뒤쪽 대한상공회의소 길가,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아랫부분에 옛 성벽 일부분이 남아 옛길 흔적을 내보인다.

인왕산 구간.

인왕산 구간(4㎞/ 약 3시간)은 돈의문 터에서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진다. 하얀 화강암이 만든 기암괴석과 산세로 눈이 시원하지만, 바위 구간이 험준해 겨울철 등산 때 주의해야 한다. 돈의문박물관마을, 경교장, 홍난파 가옥, 딜쿠샤, 창의문 등 성곽길에 늘어선 유적이 많아 충분히 보려면 한나절은 잡아야 한다.

북악산 구간.

옛사람들처럼 모든 구간을 하루에 다 걸어도 무리가 없다. 기자도 두 번 완주한 결과 8~10시간 정도 걸렸다. 오전에 숭례문에서 시작해 산세가 가파른 인왕산과 북악산 먼저 넘고, 낙산과 동대문을 거쳐 남산에 다다르는 방법도 좋다. 한낮 북악 정상에선 한 폭 꽃잎 같은 서울이, 저녁 남산 정상에선 별빛 같은 서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조선 후기 선비 신광하가 과거 시험에서 한양도성과 서울을 노래(‘성시전도시’)해 장원을 차지했다는 시구도 떠오른다. “복잡한 도성 거리는 성을 끼고 곧게 뻗고 수천만호 집들 구름 높이 솟았구나. 노랫소리는 수양버들 사이로 은은하고 꽃 같은 달은 몽몽하게 봉숭아꽃 오얏꽃 비추네.”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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