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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골목길에서 ‘마음의 고향’ 찾는 오디세우스가 되다

등록 : 2020-01-0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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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①…1만원·3시간 코스 ‘여행’

골목 통해 새로운 문화현상 탐방…첫 행선지로 해방촌 찾아

이제야 나는 오디세우스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다. 20년 세월을 타지에서 맴돌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이>의 주인공처럼 마침내 나의 고향 서울의 골목길로 향한다.

동네 아이들과 서울의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동안 어린 뼈는 단단하게 되었으며, 넘어지고 상처받을 때마다 회복 탄력성이라는 이름의 마음 근육도 함께 단련되었다.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골목은 나의 ‘토포필리아’(Topophilia)다. 특정 공간에 대한 각별한 ‘장소애’를 말한다.

‘구석구석 다양한 시간대를 품고 있는 해방촌’이라고 쓰인 입간판.

첫 행선지로 용산 해방촌을 택했다. 신년을 맞아 높은 곳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며 심호흡해 보는 맛도 있고, ‘해방’이란 단어가 주는 묘한 울림도 있으리라. 일제에서 해방된 이후 남산 아래 첫 마을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창조해온 동네다. 나는 이곳에서 독일 베를린의 도시재생을 해방촌과 비교해 강연했던 인연도 있다. 서울시 해방촌 도시재생의 총괄계획가로 2015년부터 활동 중인 한광야 동국대 교수가 생각하는 이 동네의 매력은 뭘까?

“겨울에 눈 내리면 고립된 마을로 변합니다. 불편할 수 있지만 스스로 외부와 고립되기를 원하는 자유직업을 가진 사람들, 예술가나 작가들이 선호하는 동네입니다. 남산 밑의 소월로까지 산책하기에 좋다는 것도 물론 큰 장점이지요. 혼자 오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답니다.”


해방촌은 겨울에 눈이 오면 ‘고립’되는 등 스스로 고립을 원하는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해방촌 예술마을 표지판.

해방촌을 걷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남산 중턱 보성여고 입구 버스정거장에서 내려오거나 혹은 지하철 녹사평역으로부터 남산 쪽으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는데 나는 후자를 택했다. 두 발과 심장에 전해지는 울림으로 이 동네를 만나고 싶다. 해방촌은 ‘2’라는 숫자와 연관이 높은 곳이다. 법정 동명은 용산2가동이며 지하철역 출구도 2번이다. 동네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초록색 마을버스 번호 역시 2번이다. 마을버스는 지하철역에서 동네 중심이자 남산 중턱의 해방촌 오거리까지 수직이동 시켜주는 교통수단이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남산타워가 보이는 전경.

해방촌은 흡사 미로 찾기 같다. 윗동네와 아랫동네, 그리고 용산고등학교 부근 지역 등 크게 세 곳으로 구분된다. ‘아랫동네’는 지하철과 가깝고 이국적인 음식점과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외국인이 많이 살기에 ‘HBC'라 부른다. 해방촌을 영어로 표기한 약자다. 반면 ‘윗동네’는 해방촌 5거리와 신흥시장이 있는 곳이다. 이 시장은 평안북도 출신이 주축이 되었던 해방교회의 첨탑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주민들에게 시장은 일상생활의 터전이고 만남의 장소였으며, 가슴속 깊이 애절한 삶의 서사가 자리 잡고 있는 원(原)동네다.

1959년에 발표된 이범선의 ‘오발탄’은 그때를 시대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유현목 감독이 김진규, 최무룡 등 유명배우들과 함께 영화로 만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발탄’은 한때 사격장으로 쓰였던 마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며, 주인공 송철호가 북한에서 내려와 미군 부대 부근의 판자촌에서 힘겹게 생존해나가던 현실과 희망 없는 미래를 은유한다.

이곳은 명동이나 남대문시장과 가까워서 털실을 이용한 니트 수공업으로 성장했으나 90년대를 기점으로 사양화되면서 신흥시장도 쇠락해갔다. 그러던 이 동네가 도시재생 활동가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인식되고 소상공인과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나가고 있다. 신흥시장은 크지 않다. 니트를 상징화해 털실 무스케이크로 만들어낸 카페는 산뜻한 디자인 감각이 합해져서 유명해진 곳이다.

다양한 카페가 몰려 있는 해방촌 아랫동네.

음식과 카페는 골목길 문화의 중요한 요소다. 햄버거에서부터 수제 맥주, 채식주의자 비건을 위한 사찰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식을 선보인다. 남산이 있고 시내를 전망할 수 있다는 프리미엄 때문에 주택 옥상을 루프톱으로 개조한 곳도 많이 보인다. 시장 안의 타이 음식점에서 들어갔더니 주방장은 타이인, 손님들 가운데 외국인도 눈에 많이 뜨인다. 코즈모폴리턴 분위기의 동네답다.


겨울 눈에 고립되는 해방촌…‘스스로 고립’ 원하는 예술가들 선호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과 비슷한 곳

90년대 사양화된 니트 수공업 중심지

도시재생 통해 하루가 다르게 변모

지하철역에서 해방촌으로 향하는 초입에 서 있는 안내판.

용산구청의 공식 집계로는 해방촌 전체 인구 1만2천 명 가운데 외국인 비율은 11% 조금 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5% 정도로 추산된다.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나이지리아인과 영어를 가르치는 고학력 외국인이 뒤섞여 있다. 가파른 108계단을 거쳐 오거리 방향으로 언덕을 오르면 화사한 대형건물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 부지였고, 해방 직후 숭실고등학교가 있던 곳에 자리 잡은 ‘미네르바 스쿨’이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런던, 베를린,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세계 8개 도시에 캠퍼스를 운영하는 미래형 대학의 서울 캠퍼스다.

해방촌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부작용이 비켜가지 않았다. 임대료 상승으로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입주민이 떠나야 하는 현상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서울의 많은 골목길이 낯선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집단 성형수술을 받은 것처럼 고유한 자기 얼굴을 잃고, 서로서로 비슷해진 결과다. 해방촌은 주거지역과 생산지역이 함께 돌아가는 동네다. 그러하기에 일자리 창출과 골목상권 활성화가 이곳 도시재생의 양대 현안이라고 한다. 이런 여건 속에 해방촌만의 정체성을 살려야 한다는 게 숙제다.

언덕은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노약자에게는 힘든 곳이다. 지팡이에 의지해 한숨 쉬는 노인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비좁은 골목길을 달리는 차량 때문에 어린아이들의 등하굣길도 무척 신경 쓰인다. 비탈길에 자리 잡은 작은 책방과 공방들도 눈에 뜨인다. 이 언덕은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을까? 해방촌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시인 황인숙의 시 ‘강’의 첫 부분을 읽어본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지금은 외로움과 혼자의 시대다. 모두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화려할수록, 높이 오를수록 더욱 외롭다. 혼자 있고 싶으며 동시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기를 희망한다. 독립과 고립의 중간지대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이다. 외로움은 나(me), 혼자, 골목길, 걷기 등의 단어와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현상을 만들어간다. 간섭받기 싫어하며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해방촌이란 어감은 더욱 각별하다. 언덕을 걸어 올라가는데 어느 집에선가 모딜리아니를 닮은 젊은 서양 남자가 불쑥 튀어나온다.

“제 초상화 모델이 되어주실 수 있나요?”

이탈리아 남자답게 잘생긴 용모와 스타일에 반해 많은 여자가 몽마르트르 그의 스튜디오로 직행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해방촌은 여러모로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과 비슷하다. 경사진 언덕과 계단,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이나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곳이라는 점까지 그렇다. 네덜란드의 빈센트 반 고흐, 스페인의 피카소가 처음 작업실을 얻은 곳이 바로 그 언덕이었다. 그들은 가난했고 아직 유명해지기 이전이었다.

그렇다. 여행자란 꿈꾸는 사람이다. 비록 지금은 변방이지만 언젠가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그런 꿈 말이다.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해방촌 언덕 역시 ‘꿈꾸는 언덕’이다. 남산 순환로인 소월로에 올라서면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곳의 공영주차장은 경관이 멋진 자연스러운 루프톱이며 이 여행의 방점이다. 이렇게 1만원대의 비용으로 3시간정도 즐길 수 있는 곳이 해방촌이다. 만약 골목길 미로를 헤매다가 인생의 숨은 해답까지 찾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닐까?

글·사진 손관승 작가 블로그 https://blog.naver.com/ceonomad. 인문여행 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많은 책을 썼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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