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전파길’ 정동길 따라 ‘라이프 혁명’ 뒤따랐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② 정동길과 양탕국

등록 : 2020-01-09 14:28 수정 : 2020-01-1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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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회적이며 세련된 감각 지닌 커피

‘나’와 ‘개인주의’도 함께 가져다줘

국내 유일 19세기풍 정동제일교회

훌륭한 예술가들 감성 자극 오브제

도시재생 이름 아래 ‘이방인’ 안 돼야

흔히 정동길이라 쓰고 근대화의 길이라 읽는다. 하지만 촘촘히 살펴보면 정동의 얼굴은 다양하다.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다양하고도 분리된 정체성을 가리켜 요즘은 ‘멀티 페르소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정동길이 바로 그렇다.


시립미술관 주변은 직장인들의 산책로로 사랑받는다.

정동길의 첫 번째 얼굴은 높은 돌담이다. 왕실을 상징하던 돌담을 따라 남녀가 걸어가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생기면서 한때는 이별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근처에 있던 가정법원에서 이혼 재판을 받고 걸어 나오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리라. 그 자리는 시청 별관과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뀐 지 오래다. 도심 속 미술관의 존재는 각별하다. 무겁고 칙칙한 곳에서 가볍고 화사한 곳으로 주변 색깔을 확 바꿔놓았으니까.

시청별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덕수궁과 정동길

미술관 옆 시청 서소문청사 13층 전망대에 올라가면 정동의 또 다른 매력을 만난다. 방문자들은 툭 트인 주변 경관을 감상한 뒤 으레 구내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주문하곤 한다. 이 땅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곳은 제물포 항구였지만 정동길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1883년 미국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이 앞다퉈 이곳에 공사관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들의 생활양식도 함께 따라 들어온다. 정동길은 ‘커피의 길’이며, 더 나아가 ‘라이프스타일 혁명’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하면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패션만 얘기하는 것 같지만 의식주를 중심으로 한 생활양식이 그 기본을 이룬다. 처음에는 빛깔과 맛이 탕약과 비슷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탕이라는 뜻으로 ‘양탕국’이라 불리다가 점차 커피를 음차한 한자인 가비(咖啡) 혹은 가배(珈琲)로 바뀌게 된다. 커피는 서양식 신문화의 상징이었다.

커피 애호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고종이다. 덕수궁 안에는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 ‘정관헌’이라는 이름의 특이한 건물이 있는데, 고종이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이라는 안내문이 있다. 과연 이곳에서 커피를 마셨는지 건물의 용도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많지만 고종의 커피 사랑은 분명한 것 같다. 1884년부터 3년간 고종의 어의를 지낸 알렌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이미 궁중에서 커피와 홍차를 권하고 있었다고 한다. 알렌은 또 이렇게 증언했다.

“왕은 새벽까지 일하고 매우 늦게 잠자리에 드는 습관이 있어서 보통 정오에 일어났다.”

고종의 이런 생활습관은 어쩌면 커피 때문이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유추해본다. 정동길 중간 언덕에 러시아 공사관이 있었는데, 이곳에 근무하던 앙투아네트 손탁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뿐 아니라 통역 없이 고종의 시중을 들 정도로 한국어를 잘하였다고 한다. 러시아 공사관 안에 피신해 있는 동안 그녀의 성의에 감복한 고종은 황실 소유의 벽돌건물 한 채와 땅을 상으로 내린다. 그녀는 그곳에 2층 건물을 짓고 개업하게 되는데, 그 이름이 손탁호텔이다. 서양식 음식뿐 아니라 커피도 서비스하였다고 하니 이 땅에 커피 문화를 보급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 대사관 앞의 수령 560년이 넘는 회화나무.

손탁호텔과 그녀가 살던 집은 아쉽게도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지금의 이화여고와 캐나다 대사관 자리로 추정할 뿐이다. 캐나다 대사관 앞에 있는 수령 560년이 훨씬 넘어 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만이 이 모든 일을 지켜보았으리라. 근처에는 고급 취향의 커피 전문점과 인테리어가 아름다운 카페, 베이커리가 경쟁적으로 들어서 있다. 커피는 도회적이고 지적이며 세련된 감각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커피는 유럽이 그리하였듯 ‘나’와 ‘개인주의’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술이 함께 마시는 음료라면 커피는 개인 음료의 성격이 강하니까.

이 땅에 여성 교육과 남녀평등의 씨앗을 뿌린 이화여고의 황토색 낮은 돌담이 없었더라면 이 거리의 매력은 반감되었으리라. 적색 벽돌 외벽과 검정 기와를 씌운 건물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건너편 신아일보 별관 건물은 1930년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시공했다고 한다. 정동제일교회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19세기 교회 건물이다. 예술가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훌륭한 오브제가 아닐 수 없다. 작곡가 이영훈이 이곳에서 ‘광화문 연가’의 영감을 떠올렸고, 2018년 인기 속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적·공간적 배경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러시아 공사관과 그 앞에 있던 정동수녀원은 정동근린공원으로 바뀌어 도심 속의 조용한 산책 장소가 되었다. 차인태 아나운서가 열심히 중계방송을 하던 문화체육관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근대화 과정의 상처를 간직한 중명전

추어탕으로 이름높은 노포 부근의 현대식 건물옆에 늠름하게 지키고 있다.

정동극장 옆 비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이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다 보면 ‘남도식당’이라는 허름한 간판이 보인다. 추어탕으로 유명한 노포로 주변의 현대식 건물들 틈 사이에 홀로 의연하게 서 있다. 나는 경향신문 건물이 방송사로 쓰이던 시절 그곳에 입사하여 선배들을 따라가 그 식당에서 추어탕을 처음 배웠다. 거리 어디선가 ‘겨울 나그네’가 들린다. 빌헬름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것인데, 낭만적인 제목과 달리 원래는 나폴레옹 침략 당시 지식인의 갈 곳 모르는 마음이 그 배경을 이룬다. ‘겨울 나그네’에 자주 등장하는 독일어 ‘프렘트’(fremd)란 자기 땅에서 이방인으로 전락한 신세를 말한다. 정동길이 바로 그러하였다. 외세에 의하여 혹은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가 살던 곳에서 오히려 이방인이 된 경우다. 전통이 살아 있는 식당은 그 자체로 자부심이고 훌륭한 지역자본이다. 지켜내야 한다.

수도원과 성당카페

경향신문 옆으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과 작은형제회 수도원이 있다. 회관 안에 있는 카페 산다미아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던 프란치스코가 회개했던 성당 이름에서 유래하는데 커피 가격이 저렴하고 분위기도 차분하여 종종 이용한다. 건너편으로 ‘이탈리아노’라는 경양식 집이 있었다. 연예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던데다 돈가스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 그 이탈리아노에서 나는 아내를 처음 만났다. 평생 직장과 평생의 반려자, 둘 모두 정동길에서 만난 것이다. 변방을 맴돌기만 하던 내게도 독일인들이 말하는 ‘슈테른슈툰덴’(Sternstunden)의 때가 찾아온 것이다. 직역하면 ‘별들의 시간’이지만 인생의 극적인 전환점을 뜻한다. 정동은 내게 인생 역전의 거리인 것이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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