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은 없어도…오래된 골목에는 ‘연대’가 살아 있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⑪ 묘한 동네 연희동

등록 : 2020-05-2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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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백화점 등 없는 게 많은 곳인데

살기 시작하면 쉽게 떠나려 하지 않아

오래된 무엇에 대한 자부심 대단한 듯

개성 있는 작은 상점 주택과 뒤섞이고

작은 갤러리에선 즉석 와인파티 열려

세상에는 중독성이 강한 것들이 있다. 매운맛, 금지된 사랑, 미궁을 헤쳐 나가는 컴퓨터 게임, 성공의 사다리,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드라마, 그리고 냉면이다.

평택고여사집냉면 냉면그릇


화창한 어느 날 강성곤 한국방송(KBS) 아나운서에게서 냉면 초대를 받았다.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그는 연희동에 있는 평택고여사집냉면의 오랜 단골이다. 독일 파버카스텔의 한국법인을 이끄는 이봉기 사장이 동석했다. 파버카스텔은 디지털 시대에도 빛을 발하는 세계적인 연필과 필기구 브랜드다. 강 아나운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때 젊어보았던 우리’는 3대째 대를 잇는 냉면을 앞에 두고 장인 정신과 전통음악, 아날로그적인 삶을 화제로 이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란 공통분모가 있었으며, 연희동과도 어딘지 닮은 듯했다.

“장인들에게 연필이나 만년필 같은 도구는 단지 기능적인 목적보다는 심리적인 요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창조를 위한 소중한 친구로 생각하는 것이겠죠. 디지털의 편리함 대신 아날로그의 불편함을 선택한다는 것은 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이봉기 사장의 말은 가격 중심이 아닌 가치 중심의 삶, 취향 독립에 대한 예찬으로 들렸다. 식사를 마치고 홀로 이 동네에 대한 본격 탐사에 나섰다. 연희동은 묘한 동네다. 근처에 흔한 지하철역 하나 없고 자동차 주차도 쉽지 않으며 대형 백화점이나 체인점도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동네에 살기 시작하면 쉽게 떠나려 하지 않는다. 청담동과 대치동 타워팰리스, 한남동과 성북동에 사는 사람들과 뭔가 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도대체 이곳은 어떤 매력 덩어리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연희동은 지리적으로 연세대학교와 가까워 대학교수와 교직원, 외국인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최근에는 홍대 문화권의 영향도 많이 받지만 인근 연남동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연희 걷다’라는 마을축제와 연희아트페어를 개최할 정도로 동네 문화도 성숙했다. 연희동 한가운데를 가르는 연희로 동쪽으로는 한성화교 고등학교와 서울외국인학교가 있지만 내가 걷기로 한 곳은 그곳과 정반대인 서쪽, 즉 연희맛로와 연희로11가길이다.

연희대공원

사진 찍기 좋아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은 연희로11가길, 어반플레이가 운영하는 연희대공원 같은 상대적으로 큰 복합문화공간이나 스튜디오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 맛집들이 이어지는 연희맛로가 있으며, 그 한가운데 연희동의 랜드마크인 사러가 쇼핑센터가 있다. ‘사러가’라는 이름은 어딘가 빌리지 느낌을 풍긴다. 인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웨스트빌리지,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거주지인 그리니치빌리지, 이처럼 뉴욕의 개성을 상징하는 문화와 예술가 지역에도 빌리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촌스러움을 내포한 단어 빌리지가 오히려 시대의 키워드인 것일까?

연희동의 상징 사러가쇼핑센터 우측 골목길이 연희로11길

오늘 나의 목표는 연희로11길, 이름도 비슷한 연희로11가길과 씨줄 날줄을 이루는 골목길이다. 사러가 쇼핑센터에서 북쪽 방향으로 연남전기철물, 정음전자와 대구떡집 같은 이름들이 보여 정겹다. 양갱 등 팥 음식의 고급화로 성공한 금옥당과 항상 줄서서 먹는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 그 앞 뉴욕 스타일의 ‘에브리띵 베이글’, 개성 있는 작은 상점과 가죽공방, 사진 작업실, 고기 곳간과 꽃집, 방앗간, 참기름집 등이 주택가와 뒤섞여 있는 독특한 골목이다.

갤러리 L153실내풍경

연희로11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면 슈퍼마켓을 전면에 두고 5거리가 나오는데, 좌측으로는 ‘연희동 사진관’과 서연중학교, 직진하면 왼쪽으로 ‘L153’이라는 아담하면서도 시크한 작은 갤러리가 나온다. 사러가에서는 약 260m, 천천히 걸어도 5분 미만의 거리다. 마침 이곳에 사진작품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방문하고 싶다는 소망을 알렸다. 코로나 시대에 이처럼 귀한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까닭이다. 붉은색 강렬한 작품과 대조적으로 심플한 공간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이상정 대표는 감성적인 여성지 <마담 피가로> 편집장 출신으로 딸과 함께 1년 가까이 세상의 골목길을 두루 걸으며 모녀의 여행 이야기로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됐던 주인공이다.

“잡지사를 그만두고 좋아하는 나의 일을 하기 위해 찾다가 어떤 작가분의 소개로 8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어요. 대박은 없지만 망하지도 않는다는 말에 딱 이끌리더군요. 하하하!”

폴앤폴리나 빵

명품과 예술을 연결하는 ‘아트 컬래버레이션’ 영역을 개척한 주역답게 이 대표는 연희동의 골목길 공방들과 함께 ‘연희탐구생활’이란 독특한 문화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방문자가 몇 명 늘자 즉석 와인 파티가 기획됐다. 파티라지만 갤러리에 보관 중이던 포도주 한 병을 따고 사러가 쇼핑센터까지 걸어가 사온 치즈와 근처 맛있는 빵집 폴앤폴리나에서 가져온 따끈따끈한 바게트가 전부였던 소박한 테이블이었다. 하지만 구수한 빵 냄새와 색깔이 있는 예술, 그 색깔 못지않은 다양하면서도 강렬한 삶의 이야기가 녹아드니 그 이상 필요한 게 없었다. 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는 건물 뒤편으로는 테라스가 아름다운 내추럴 와인 전문점 ‘비노테카#202’가 마치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었다.

와인 한 병 사서 갤러리로 돌아오니 창밖으로는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손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작은 갤러리는 골목길의 훌륭한 소통 역할을 하고, 골목길은 문화의 플랫폼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매력을 가리켜 연희동스럽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동석한 경향신문 김진호 전문기자는 인근의 만두전문집으로 초대해 뒤풀이 겸 이 동네 역사를 구수하게 풀어냈다. 컨선월드와이드의 이준모 대표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점점 없어져가는 골목길이지만, 사람과 동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게 연결되어진 골목길 이야기는 마치 구불구불한 우리 삶의 길들이 서로 만나고 있는 듯했다.”

특정한 조직에 소속됨 없이 자유직업인으로 일하는 나는 그날 밤 아끼고 아껴두었던 ‘연대’라는 단어를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 노트에 꾹꾹 눌러쓰고 있었다. 어쩌면 행복과 동의어로 그 말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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