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독립서점, 작은 공간에서 큰 울림 만들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⑬ 표현자의 거리 서촌

등록 : 2020-06-18 14:22 수정 : 2020-06-1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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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등 거장 살고

시인 이상-화가 구본웅 우정 다진 곳

상처투성이 세상 독특함 표현한 그들


그 맥락 이어 독립서점 곳곳 자리잡아

일러스트·‘진’ 다루는 ‘오프 투 얼론’

한달에 책 한권 전시 ‘한권의 서점’


제각각 차별성 뽐내며 존재감 과시해


서촌은 전통적으로 ‘표현자’(表現者)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작가, 예술가, 음악이나 무대 위에 서는 사람들, 비주얼 아트, 만화 등 창작과 자기표현을 통해 생활을 꾸려나가는 직업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최종현·김창희가 함께 쓴 <오래된 서울>의 한 토막을 읽어보자.

“조선시대에 글을 다루는 데에 익숙한 사대부들과 중인 시인들, 김정희와 같은 당대의 서예가, 정선과 같은 거장 화원 등이 이곳에 두루 살았다. 서촌이 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서촌이 그런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상과 구본웅이 처음 만난 신명학교 자리. 지금은 배화여고로 변했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 시절 통인동 골목길에 살았고 일제강점기 화가 이쾌대, ‘사슴’ 시로 유명한 노천명 역시 서촌 사람이었다. 서촌을 말하면서 천재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의 인연은 신명학교에서 시작한다. 지금의 사직공원 옆 배화여고가 있는 자리로, 당시에는 4년제 보통학교였다. 구본웅은 이상보다 네 살 많았지만, 어릴 때 사고로 척추를 다쳐 곱사등이가 되는 바람에 학교를 늦게 다니게 됐다. 놀려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이상은 그를 가까이했다. 이상에게도 숨은 상처가 있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직동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부자인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그 집에서 머물게 되는데, 지금 ‘이상의 집’으로 명명된 곳이 큰아버지 집터의 일부다.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뻗은 길이 자하문로인데, 자하문로의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바로 옆 골목에 있다.

자의식은 강했지만 각기 다른 인생의 상처로 아파했던 두 사람은 이상이 28살로 요절하기 전까지 남다른 우정을 과시했다.

이상의 집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 그는 왜 ‘이상’이라는 필명을 쓰게 되었을까? 구본웅 때문이다. 구본웅은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작은아버지로부터 화구를 담는 상자를 선물로 받았는데, 당시에는 그림 그리는 도구를 담는 상자 혹은 가방을 가리켜 ‘사생상’(寫生箱)이라 불렀다. 구본웅은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던 그 사생상을 나이 어린 친구에게 주었다. 감격한 김해경은 ‘상’(箱) 자를 반드시 자신의 아호에 넣겠다고 약속하면서 이상이란 필명이 탄생했다. 상처투성이인 세상에서 표현자로 살겠다는 굳은 맹약이다.

‘날개’ ‘오감도’로 유명하지만 이상은 원래 건축가였다. 서울대 건축과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 졸업하고 총독부 건축 부서에서 일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화상>으로 입선하는 등 건축, 그림, 문학 등 다방면에서 자기표현에 뛰어났다. 반면 불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구본웅은 이상을 모델로 <친구의 초상>을 그렸고,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여인상> 등 독자적인 화풍으로 ‘조선의 로트레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상이 구본웅의 나이 어린 이복 이모 변동림과 결혼함으로써 전설 같은 이야기는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천재들의 재능을 시기한 것일까? 이상은 28살의 나이로 도쿄에서 숨지고, 구본웅은 48살에 서촌에서 눈을 감는다.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우정은 변치 않았다.

서촌의 명물 통인시장

이상과 구본웅이 서촌에서 활동한 시기는 1920년대와 30년대, 이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재를 박제로 만들었던 식민지 시대였다. 세월은 흘렀지만 서촌에는 여전히 많은 표현자들이 활동한다. 이들에게 서촌의 매력은 무엇일까? 김수진 작가는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통인시장 옆 골목에서 ‘오프 투 얼론’(Off to Alone)이라는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에서 9년, 영국에서 2년 정도 지내다 서촌에 정착했다.

“5년 전쯤 이곳에서 전시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이 동네가 참 좋았어요. 좁은 골목길이 아름답고 작은 음식점이나 카페도 개성 있고, 창의적인 분위기가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내친김에 사는 곳까지 이 근처로 이사했지요.”

그녀의 서점은 일러스트레이션과 ‘진’(Zine)에 강점을 갖고 있다. 잡지(Magazine)와 동인지(Fanzine)와 비슷한 어원으로, 잡지라고 하기에는 분량이 적고 소수를 대상으로 하는 개인적인 형식과 내용을 다루는 장르다. 그녀의 안내로 마스크를 끼고 서촌의 독립서점 몇 곳을 더 들러보기로 했다. 근처 자하문로9길에 있는 ‘한권의 서점’을 방문했다. 한 달에 한 권의 책만 전시 판매하는 독립서점으로, 서점은 ‘스테이폴리오’라는 숙소와 연계해 열쇠를 전해주는 프런트 노릇도 한다. 서점에서 체크인하기 때문인지 명함에 새겨진 문구도 이채롭다.

“Open the door, open the book.”(문을 열라, 책을 펴라!)

독립서점의 시조 격인 더북소 사이어티

여기서 서촌의 동맥과 같은 자하문로를 건너가면 자하문로10길이다. 중간쯤 역사책방 옆 건물 2층에 ‘더북소사이어티’가 있다. 미술관이나 전시 관련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진 독립서점의 시조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큰길을 따라갈 수도 있지만, 이곳의 진정한 매력은 미로 찾기 하듯 서촌 한옥마을의 뒷골목을 걷는 것.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작은 공방들이 숨어 있다. 골목을 나와 효자로7길에 이르면 사진 전문서점 ‘이라선’(Irasun)이 기다리고 있다. 루이스 폴센 조명과 아날로그 턴테이블에 흐르는 음악이 감성을 자극하는 곳이다. 여기에 전시된 사진 책들은 파리와 뉴욕의 전시회에서 직접 고른 것이라고 김진영 대표는 강조한다.

“근처에 미술관이 많아서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주로 찾습니다. 책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사가 없는 음악으로 선곡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보안1942 2층 서점

서점의 인기 연두

여기서 1분 거리에 복합문화 공간 ‘보안1942’가 있고, 그 2층에 보안책방이 있다. 경복궁이 내다보이는 창밖 풍경이 아름답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연두’, 서점에서 사는 스코틀랜드의 양몰이 반려견 이름이다.

서촌의 독립서점들은 지리적으로 대형서점 교보문고와 멀지 않기에 차별성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주제, 스타일, 인테리어, 커피, 소품…. 뭔가 달라야 한다. 표현자로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관점이나 앵글, 스타일, 색깔이 차별화돼야 한다. 직업과 취미의 경계가 없어져 누구나 표현자를 자처하는 이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독립적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지만,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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