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책방에서 와인 마시고, 영화도 본다”

전유안 기자의 나홀로 ‘관악구 책방 여행’

등록 : 2020-06-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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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독립책방 등 책방만 20개

골목골목 책방들, 도시인 삶의 방향제


‘살롱드북’, 밤까지 맥주와 칵테일 즐겨

‘관객의 취향’, 영화 보고 영화책도 보고

‘책방 달리, 봄’, 여성들의 서사 한곳에

‘그날이 오면’, 현인들의 삶의 지혜 얻어

관악구 골목 풍경에 생기가 돈다. 80~90년대생 책방 주인들이 저마다 개성 있는 책방을 꾸리고 있다. 독립책방 ‘살롱드북’은 책과 술, 이야기를 좋아하는 청년들이 모여 작당과 모의를 펼치는 공간이다.


서울시 관악구엔 왜 책방이 많을까? 서울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나와 볼일을 마치고, 어슬렁어슬렁 일대를 걷다가 책방을 줄줄이 맞닥뜨린 5월의 어느 오후였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일대 서점을 검색해 개수를 세어보니 중고책방, 독립책방, 대형책방 등 20개에 달했다.

관악(冠岳)의 어원을 찾아봤다. ‘갓 모양’ 바위가 봉우리에 있어 이름을 따왔다는 ‘관악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선비의 갓이 동네 이름에 있으니, 서책이 친숙한 동네일 수 있겠다. 혹은 관악산 북쪽 능선에 자리한 서울대학교 캠퍼스의 영향일 수도 있다. 지성이 모이면 책방도 모이는 법이다. 하지만 이 의문에 가장 현실적인 답을 던진 이는 신림동 한 중고책방 주인이었다. “임대료가 중심보단 저렴하죠. 겨우 버티는데 내년엔 모르겠어요.”

관악구는 지난 한 해 동안 청년예술가들의 문화예술 공간을 아카이빙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책방 ‘하얀정원’에선 청년예술가들 출판을 지원하고 독자에게 적극 소개한다. 관악구 청년 문화공간에 대한 소개와 팁도 얻을 수 있다.

어쨌든 관악구엔 일상을 단단히 지켜주는 책방이 많다. 서책이 좀먹는 것을 막기 위해 옛사람들이 책장 사이마다 포개었다는 ‘운초’(芸草: 미나리과 여러해살이풀)처럼, 골목마다 포개진 책방들은 도시인들 삶이 좀먹는 걸 막아준다.

관악구 독립책방 단골손님과 책방 주인들이 협력해 만든 단행본 . ‘살롱드북’ ‘책방 달리, 봄’ ‘여행마을’ ‘관객의 취향’ ‘엠프티폴더스’ 등 일대 책방 풍경을 만화로 담았다.

늦은 밤까지 책과 술을 즐길 수 있는 곳, 방문객 취향에 맞춰 가지각색 다양한 책을 구비한 곳을 찾는다면 ‘살롱드북’이나 ‘관객의 취향’을 찾아간다. 독립책방이다. 각각 재기발랄한 동시대 작가들 창작물과 영화 관련 콘텐츠를 모은다.

‘살롱드북’에는 독립출판물 외에도 인문학 위주 단행본들이 있다. 18세기 유럽 사교의 장이자 지적 토론의 장으로 불린 ‘살롱 문화’처럼 책과 문화, 자유로운 지식 공유, 누구나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을 추구한다. 무엇보다 늦은 밤 맥주와 칵테일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월~토요일 자정까지 문을 연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관객의 취향’에서 수많은 즐길거리를 찾아낼 수 있다. 다양한 독립출판물 외에도 영화 원작 소설, 영화감독이나 배우가 쓴 책, 시나리오, 국외 영화 굿즈 등을 전시하고 판다. 매일 밤 영화를 상영하며, 관련 워크숍이나 영화·독서모임도 수시로 연다. 월요일만 쉬고 평일 밤 11시까지 문을 연다.

좀더 분명한 색깔과 향기를 내뿜는 공간을 찾는다면 ‘책방 달리, 봄’을 두드려본다. 봉천중앙시장 중턱에 있다. ‘여성들 서사’를 모은 독립책방이다. ‘여성 생애사 서점’이라고도 부른다.

‘책방 달리, 봄’은 주류에서 배제된 약자들의 목소리를 세심하게 큐레이팅한 서가가 인상적이다. 주인장이 직접 내리는 드립 커피 맛도 좋다

‘책방 달리, 봄’은 여성 자서전 출판사 ‘허스토리’로 시작한 공간이다. 먼저 ‘허스토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역사학을 공부한 부부 대표가 ‘우리 엄마,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려고 2016년 차린 출판사다. 주류 역사에서 배제된 목소리를 수집하고자 했다. 처음엔 희망자들 신청을 받아 어머니들의 생애를 인터뷰해 기록했는데 점차 장년층·노년층 여성을 향한 관심으로 확장했다. 숨어 있는 이야기들, 특히 그동안 ‘부차적으로 여겨져온 동시대 여성들을 수집해 세상 밖으로’ 올리는 데 힘을 쓰는 공간이다. 책방 이름도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주는 책방’ ‘지금과는 다른 봄이 움트는 책방’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시즌별로 운영하는 멤버십에 가입하면 페미니스트 큐레이션 웹진 <달리봄> 무료 구독권이나 큐레이션 도서 발송 혜택 등을 받아볼 수 있다.

관악구 모든 책방에서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 제로페이 등으로 결제할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도 관악구 신림동 골목 속에서 건재하며 버티고 있다. 오늘날 보기 힘든 ‘인문사회과학 전문’이란 간판 속 문구는 책방이 간직한 지난 30여 년 세월을 보여준다. ‘그날이 오면’은 1988년 대학가에 문을 연 열린글방, 광장서점 등 6곳가량 됐던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는 87년 6월 민주항쟁과 80년대 초반부터 활발했던 학생운동·학회활동 영향으로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홀로 오롯이 남았다. 이른바 ‘큐레이션’이 강점이다.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우직한 목소리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 없는 동시대 현인들의 책을 찾는 이라면 여전히, 삶의 지혜를 풍부히 건질 수 있는 곳이다.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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