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동 골목의 옛 ‘면’집, 서울의 ‘면’을 살리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⑯ 오래된 식당 많은 무교동

등록 : 2020-07-30 15:12 수정 : 2020-07-3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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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울의 대표 주점 거리였던 곳

골목골목 직장인들 애환 서려 있는데

이제 옛 명성 다 사라졌나 싶었지만

좁은 골목엔 아직 오래된 음식점 남아

서울의 정체성이 이어지는 것 보여줘

“오랜만에 일면식 할까요?”

후배의 반가운 점심 제안이다. 얼굴을 안다는 면식(面識)이 아닌 함께 면(麵)으로 식사하자는, 우리끼리 통하는 일종의 은어였다. 자장면, 국수, 파스타, 베트남 쌀국수, 일본식 우동, 라면, 칼국수에 이르기까지 면으로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즐겨 먹기에 우리는 ‘면식범’을 자처한다. 더운 여름이니 냉면을 먹기로 하고 시청역에서 내렸다. 뜨거운 열기 사이로 서울광장의 분수가 시원하게 내뿜고 있었고, 광장의 넓은 푸른 잔디 뒤에서는 서울도서관의 육중한 문이 다시 활짝 열려 있었다. 옛 시청 자리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 서울의 지적인 얼굴이듯이 무교동은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이다.


“너무 오랜만에 냉면집에서 뵈니 면이 서질 않네요.”

늘 그렇듯 우리는 만나면 언어의 유희로 시작한다. 그들이 일하고 있는 신문의 지면과 체면, 여기에 냉면을 복합적으로 뒤섞은 인사였는데, 말과 글을 다루는 우리에겐 언어가 일이면서 동시에 취미생활이었다. 그것은 가장 비용이 적게 들어가는 스트레스 해소제이기도 하니까. 그들은 원래 을지면옥 취향이지만 무교동에 새롭게 지점을 낸 을밀대에서 만났다. 이유는 단 하나, 오전 업무 일정이 빠듯한 그들의 일터와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두 냉면집 이외에도 평양면옥, 필동면옥, 우래옥, 오장동 함흥냉면 등 특정 냉면집에 대한 호감을 넘어서 광적인 숭배심을 보이는 반면, 다른 냉면집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적개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지 않다. 다행히 그들은 그 부류에 속하지는 않았다. 나는 상대가 좋아하는 스타일에 따라 서울의 전통 있는 냉면집을 두루 순례하길 좋아하니 일종의 ‘면(麵)학파’라고나 할까.

을밀대

을밀대 냉면

식탁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 무교동이다. 점심때인데 곳곳에서 ‘선주후면’(先酒後麵)이다. 즉 빈대떡이나 편육 한 접시를 가운데 두고 소주나 막걸리를 나눠 마신 뒤 냉면을 비우는 식사 습관을 말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점심때 당연히 와인이 등장하고, 독일인이 물 대신 맥주를 주문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무교동에서는 무교동 특유의 식문화가 있다. 그것이 바로 선주후면의 전통이다. 서울 3대 추어탕집이라는 용금옥, 술안주가 푸짐한 부민옥과 정치인들이 애용하던 남포면옥, 민어탕과 멍게밥이 유명한 충무집 같은 곳에서는 점심 자리에서도 반주를 함께 해야 무교동스럽다고 말한다.

부민옥

서울 구시가지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 무교동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곳에서 기울인 소주잔의 숫자가 곧 직장생활 경력을 의미했다. 밥 먹듯 야근하고 주말 없이 일하던 시절 동료, 선후배들끼리 골뱅이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서로 위로하고, 다음날 아침이면 북엇국이나 콩나물 해장국 한 그릇 나누며 정을 도탑게 쌓아가곤 하였다. 그렇게 골목골목 직장인들의 애환과 페이소스가 서려 있는 무교동이다.

하지만 시대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무교동의 선주후면 풍경도 점차 전설처럼 사라져가고 있다. 예전에는 점심때 소주나 막걸리 한 병 주문하는 게 당연했다면 이제는 이상한 사람, 더 나아가서 반사회적 행동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니까.

“오랜만에 점심때 소주 한잔 나누며 즐겁게 담소하고 돌아가 다시 즐겁게 일할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합니다.”

헤어지기 직전 함께했던 이의 말이 애잔하게 들렸다. 이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 얼굴이 바뀌었듯이 무교동도 내게 익숙하던 모습은 더는 아니다. 이전과 달리 밤 9시가 넘으면 주문받지 않는 식당이 많다. 골목길의 노포들을 둘러본 뒤 다시 시청 옆길로 나와 을지로입구 쪽으로 걷는다. 옛 미국문화원 옆 삼성빌딩 건물에 ‘라칸티나’ 간판이 보인다. 1967년 문을 열어 지금까지 영업 중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식당이다. 칸티나(Cantina)는 이탈리아 말로 지하 와인 저장고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식사와 와인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도 의미한다. 스파게티나 링귀네, 탈리아텔레, 페투치네, 펜네, 리가토니, 뇨키 등 다양한 면을 취향에 따라 주문할 수 있기에 서양식 면식범을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이름이다.

라칸티나

링귀네 라칸티나

“지금도 종업원들이 검정 양복을 입고 음식을 가져다주던가? 한창 시절 나도 그 집에 꽤 자주 드나들었지.”

하동관과 더불어 올해 94살인 장인어른과 내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드문 전통 음식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라칸티나. 퓨전이 대세인 이 시대에도 정장 차림의 중년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테이블 위에는 은쟁반이 놓여 있다. 외국 경험이 일천하던 시절 삼성그룹을 비롯한 상사 직원들이 해외출장 나가기 전 이곳에서 서양식 음식과 식탁 예절을 동시에 익혔으니 일종의 음식 사관학교 구실도 담당했다. 수십 년 된 서울의 노포에 가면 음식이 맛있기는 한데 불친절하거나 화장실이 청결하지 않아 불만인데, 이 식당은 50년 넘었으면서도 여전히 깔끔하고 여전히 우아하다.

만약 전날 밤 과음하고 다음날 점심 약속이 이곳으로 정해졌다면 나는 반드시 ‘링귀네 라칸티나’를 주문하곤 했다. 조개 국물에 링귀네 면을 넣어 끓인 이를테면 칼국수의 파스타 버전인데, 해장에 이보다 더 좋은 메뉴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시청과 청계천 사이에 있는 다동과 무교동을 통칭해 무교동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청계천 주변에 과일을 주로 파는 모전이 있어서 모전다리라 불렸던 곳과 지금 시청 자리에 무기를 만들던 관청이 있는 곳에도 모전다리(아래 모전다리)가 있었는데, 이곳이 윗 모전다리와 구분하기 위해 무기 무(武) 자를 사용하여 무교(武橋)라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쪽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가장 번화한 비즈니스 타운이 있는 곳 중간에 무교동은 섬처럼 자리잡고 있다.

대로에 전통을 자랑하는 서양 파스타 식당이 있고 그 뒤 골목길에 오래된 국숫집이 의연하게 지키고 있는 곳이 무교동이다. 도심 한복판에 게임을 하듯 좁은 골목길의 미로를 찾아 들어가는 것은 분명 서울의 또 다른 매력이다. 한복과 국악, 기와지붕만이 전통은 아니다. 전통도 생물처럼 우리 곁에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아버지가 다니던 국숫집을 아들이 찾고 할머니가 좋아하던 냉면집을 손녀가 방문하는 풍경을 가리켜 전통이 살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오래된 면(麵)이 살아야 그 도시의 면(面)이 선다. 진정한 정체성이다.

을지로입구역 1-1 나와서 만나는 디스트릭트C 녹지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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