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정겨운 쉼터 품던 노란 은행잎, 늦가을에 잘가라 인사하다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⑩ 짙은 가을 떠나보내는 종로구의 단풍 물든 오래된 나무들

등록 : 2020-11-12 14:56 수정 : 2021-04-1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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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매달렸을 땐 화르락 타던 불꽃

가을 보내면 거리에 뒹구는 재가 되고

잎 떨군 가지들, 마음속 추상화가 되어

사람들 소원 담은 붉은 잎 그리워한다


가을이 절정을 지난다. 나무에 매달린 단풍잎은 ‘화르락’ 타오르는 불꽃 같아서, 먼지와 엉겨 뒹구는 거리의 낙엽은 다 타고 남은 재 같아서, 가슴이 울렁거린다. 깊은 가을 속으로 걸었다. 그 길에서 만난 나무들은 수백 번의 가을을 그렇게 보냈다고 생각하니 고목의 단풍이 처연하다. 사연 품은 고목의 가을이 또 그렇게 간다.


북관대첩비와 은행나무, 그리고 겸재 정선의 느티나무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옆 뜰에 단풍 물들었다. 노랗게 반짝이는 은행나무는 사람들을 쉬게 한다. 무슨 사연 깃든 나무는 아니지만 뜰을 환하게 밝히며 사람들을 품어주는 그 자체가 내력이다.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홀로 선 비석은 북관대첩비를 복제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북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일대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왜병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북관대첩비다. 대한제국 시절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패배의 기록이 적힌 비석을 뽑아 일본으로 보냈다. 2005년 우리나라 정부와 민간단체가 비석을 되찾아왔다. 비석은 원래 자리인 함경북도에 다시 세워졌다. 나무들 사이 산책길을 걷는다. 그곳에는 하얀 껍질의 백송, 불에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는 자작나무, 아래서부터 여러 갈래로 줄기를 뻗는 반송, 누워서 자라는 향나무인 눈향나무, 옛이야기 ‘혹부리 영감’에 나오는 개암나무, 주목, 이팝나무, 뽕나무, 느릅나무, 가래나무, 매화나무, 오동나무, 배롱나무, 갈매나무, 박태기나무, 복자기, 단풍나무 등 여러 나무가 모여 있다. 그중 도드라지는 건 붉은 단풍의 복자기와 단풍나무다. 넓게 퍼진 단풍나무 가지가 처마 같다. 붉은 단풍 아래 서서 멀리서 반짝이는 노란 은행나무 단풍을 바라본다.

국립고궁박물관 뜰 은행나무와 북관대첩비 복제품.

다음에 도착한 곳은 무궁화동산이다. 48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조선시대 사람 김상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척화를 주장했던 사람이 김상헌이다. 전쟁이 끝나고 척화의 주요 인물로 지목된 그가 청나라로 잡혀가며 남긴 시조가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무궁화동산은 김상헌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무궁화동산 근처 경복고등학교는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이 살던 집과 선조 임금 때 승지를 지낸 조원의 가족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지키려다 왜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조원의 두 아들 이야기가 이곳에 깃들어 있다. 현재 종로구 효자동의 유래이기도 하다. 겸재 정선이 살던 곳을 알리는 조형물이 잔디밭에 놓였다. 단풍 물든 뜰을 거닐다 바라본 풍경에 인왕산이 보인다. 겸재의 <인왕제색도>가 떠올랐다. 조원의 가족들도, 겸재 정선도 한 번쯤 마음을 기댔을 600년 넘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 뜰에 있다.

경복고등학교 뜰에 있는 겸재 정선 집터를 알리는 조형물.

칠궁의 오래된 나무들

무궁화동산 한쪽에 칠궁 관람 안내소가 있다. 칠궁은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 후궁 일곱 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임금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숙빈묘를 영조는 재위 당시 육상궁으로 승격시켰다. 고종과 순종 때 흩어져 있던 후궁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겼다.

칠궁은 이렇게 완성됐다. 영친왕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후궁인 귀비 엄씨의 사당 덕안궁,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대빈궁, 추존 왕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선희궁 등은 신위의 주인공과 그들이 낳은 왕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 때문인지 사당 건물에 감정이 얹힌다. 사당에 모신 어머니가 외로울까 걱정돼 사당 옆 건물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던 영조의 효심을 보았을 느티나무 한 그루가 지금은 공사 중인 냉천정 옆에 있다. 1800년대 초중반에 심은 향나무와 주목은 육상궁으로 들어가는 삼문 옆에 있다.

신영동 골목길에서 만난 550년이 다 돼가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해거름 마을 골목길을 밝히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만 해도 거대한 고목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나뭇가지 아래 앉아 울긋불긋 물든 고목의 단풍이 골목길이 있는 마을의 늦가을 저녁 어스름을 맞이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다시 오래된 나무들을 찾아 나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 170년 넘은 비술나무 세 그루가 높고 맑은 가을 하늘과 잘 어울렸다. 은은하게 물든 단풍잎이 바람에 떨어지며 공중에서 나부낀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얼기설기 얽힌 가지들이 만든 추상을 읽는다. 이 거리에서는 오래된 나무도 예술이 된다.

화동길과 계동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중앙고등학교 앞이었다. 학교 교문 안에 있는 은행나무는 계동길 골목에서도 훤히 보인다. 500년 넘게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 이 나무는 조선시대부터 매년 가을이면 마을 사람들이 제를 올리며 소원을 빌었던 나무다. 그 소원을 밝혀주듯 올해도 단풍이 노랗게 물들었다.

칠궁 담장 안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보인다.

성균관과 권율 장군 집터를 지키는 나무들

연지동 옛 정신여자고등학교 자리에 남아 있는 회화나무는 550년이 넘었다. 일제강점기 3·1 만세운동 당시 일제가 정신여고를 수색한 일이 있었는데, 태극기와 국사 교재, 비밀문서 등을 이 나무에 난 구멍에 숨겨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연지동과 접한 인의동에는 500년 넘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임금 광해군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조계사와 우정총국 마당에도 오래된 나무가 여럿 있다. 우정총국 앞마당 회화나무는 우정총국 기와지붕을 감싸듯 자랐다. 1884년 4월 개설된 우정총국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다. 그해 개화파의 정변인 갑신정변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어났다. 그 이후 우편 업무가 중단됐고, 훗날 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체신기념관이 됐다.

우정총국 회화나무에서 조계사 대웅전 앞에 있는 500년 가까이 된 회화나무로 가는 길에 종로구에서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한 80여 년 된 수수꽃다리가 한 그루 있다. 봄이면 꽃향기가 사위에 퍼졌을 텐데 지금은 새봄에 피어날 꽃을 위해 나무는 잎을 떨군다.

정독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길을 반기는 건 도서관 진입로 한쪽에 있는 250년이 다 돼가는 회화나무다. 측백나무와 어울린 회화나무 가지가 하늘에 드리웠다. 또 한 그루의 회화나무는 300년이 넘었다. 정독도서관은 김옥균의 집이 있던 곳이다.

성균관대학교 문묘 명륜당 앞 은행나무 두 그루는 천연기념물이다. 1519년(중종 14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은행나무는 벌레가 잘 슬지 않는다 하여, 관료가 되어서도 부정부패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향교, 서원 등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성균관대학교 문묘 명륜당 앞마당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어울린 풍경.

거대한 고목에도 단풍은 들어 잎마다 노란빛이 산란한다. 은행나무 옆 작은 단풍나무의 붉은빛과 함께한 풍경이 한옥 기와지붕과 잘 어울린다.

행촌동 권율 장군 집터 은행나무를 보러 가는 길, 돈의문 터에서 서울시교육청 앞을 지나 월암근린공원으로 올라서서 걷다보면 멀리 인왕산과 그 아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풍경에서 도드라지는 건 노랗게 물든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다. 그 자태가 늠름하다.

그 나무를 향해 걷다보면 골목에 다다른다. 나무는 집과 집 사이 좁은 터에 어지럽게 널린 전선들 사이에 있다.

권율 장군 집터의 은행나무는 460년 넘게 그 마을을 지키고 있다. 몇 해 전까지도 그 나무 아래는 누군가 소원을 빌었던 흔적이 남아 있곤 했다.

권율 장군 집터 은행나무.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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