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 골목길은 공감과 위로를 만나는 곳”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㉔ ‘이방인의 거리’ 이태원

등록 : 2020-12-17 14:46 수정 : 2020-12-1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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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과 다른 관점 보여주는 골목길

이태원도 하나 아닌 다양한 페르소나

모두 코로나 상처 피해가진 못했지만

다양한 골목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면

힘든 순간 이겨낼 기적의 출발 될 수도

코로나 블루의 지루한 터널에 갇혀 ‘내적 망명자’로 지내던 어느 날 밤 휴대전화가 울렸다. 암 투병 중인 친구였다. 혹시나 해서 가슴을 진정시키며 받았더니 안심시키려는 듯 친구는 농담부터 시작했다.

“내가 누워서 전화하니까 이 정도지, 만약 일어나서 전화한다면 목소리가 훨씬 더 우렁찰걸? 유머를 잃으면 다 잃은 거야, 안 그래? 하하하~.”


치료를 위해 또다시 입원을 앞둔 사람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남자들끼리 통화는 대개 1분 안에 끝나지만, 우리의 대화는 30분 이상 이어졌다. 전화를 끊기 전,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요즘도 밤늦게까지 글을 쓰는 것 같던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 실감하게 돼. 돈, 명성, 지위, 그런 건 없어도 돼. 건강부터 잘 챙겼으면 좋겠다.”

누가 환자이고 누가 위로하는 사람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다음 날 나는 그의 충고에 따라 책상을 박차고 거리로 나갔다. 영어권에서 말하는 ‘Moving on’, 살아 있다는 것은 꿈틀거림이고 변화하려는 태도일 테니까. ‘공감’이란 이름의 신발을 신고 계속해온 골목 시리즈도 마감할 때이고, 때마침 블루스퀘어에서 공감과 관련해 흥미로운 전시회도 열리기에 겸사겸사 이태원로를 걷기로 했다.

해외 근무 기간을 제외하고 인생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서울은 여전히 낯설다. 어느 것이 진정한 얼굴인지 너무도 다양한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 통칭 이태원 지역이라 말하지만, 해밀톤호텔과 제일기획을 기준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재래시장과 서민 주택, 다문화 공간이 지배하는 반면, 동쪽과 북쪽 즉 한강진역 방향으로는 고급 주택과 명품 매장이 자리 잡고 있어 한남동 문화권에 속한다.

녹사평역에서 이태원역 방향

녹사평역, 이태원역, 한강진역 등 지하철역이 세 곳이나 되지만 보도로 2㎞ 정도다. 녹사평역에서 내려 초입에 있는 골목마켓과 이태원시장 주변부터 돌아보았다. ‘빅 사이즈’ 의류를 판다는 안내문으로 이곳이 이태원관광특구라는 것을 깨닫게 될 뿐 예전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베트남 퀴논길 역시 거리의 장식등과 사슴조각이 오히려 추워 보일 정도로 썰렁했다. 큰길로 다시 나와 이태원역 삼거리 부근에 터키 명물 케밥 파는 가게가 많이 보인다. 해밀톤호텔 뒤로는 ‘이태원 음식거리’, 인도식 카레와 발칸반도의 꼬치구이, 브라질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리를 즐기려는 식도락가들로 붐볐지만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이태원의 주축 도로인 이태원로에는 영어 간판이 주류를 이룬다

홍대 앞, 강남과 더불어 서울의 3대 클럽 지역이라는 이태원 클럽들은 이태원역 삼거리를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다. 한국에 영국식 펍 문화와 수제맥주 운동이 시작된 곳이 부근 골목길이다. 이태원 소방서 뒤편, 우사단로 부근 골목에는 게이바와 트렌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위한 클럽도 군데군데 눈에 보인다. 지난 5월 이곳의 한 클럽에서 코로나19 집단 확진자가 나온 이후 사회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이태원 파출소 뒷길은 일명 ‘나이지리아 골목’이라 불릴 만큼 흑인이 많다. 인근에는 모스크, 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이 자리 잡고 있다. 동대문 쪽에 자리 잡았던 우즈베크인들도 우사단로10길 부근에 몇 년 전부터 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동 음식인 할랄 푸드를 파는 식품점도 눈에 많이 뜨인다.

이태원의 랜드마크 해밀톤호텔

해밀톤호텔을 등지고 보광로 방향으로 한참 내려가면 ‘앤틱거리’, 값비싼 고가구를 파는 곳이다. 다시 주축 도로인 이태원로에 돌아와 제일기획을 넘어 한강진역 방향으로 향한다. 이태원 소방서에서 한강진역까지는 일명 ‘한남동 가로수길’이다. 고급 자동차 전시장과 패션 리더들이 이끄는 매장, 고급 음식점이 즐비한 화려한 거리지만 역시 팬데믹의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다. 한쪽에는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용산국제학교, 길 건너편으로는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가 서 있다.

한남동 가로수길의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지하철 한강진역 옆에 있는 블루스퀘어의 네모 전시장에 도착했다. 티앤씨재단이 주최한 공감을 주제로 한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회에 들어서자 앵무새 모형 조각과 함께 벽에 적힌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얘기 들었어?”

귀에 솔깃한 소문을 듣고 생각 없이 전한 이야기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져 차별과 혐오라는 이름의 괴물이 되는 걸 보여주고 있다. 교양 있어 보이던 사람조차 익명의 가면을 쓰면 근거 없는 말에 동조와 방관을 하게 되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일조한다. 타인의 말에 맞장구쳐주는 것이 좋다고 착각하는 비뚤어진 공감의 폐해다. ‘벌레 먹은 숲’이라는 작품은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이미지이지만 가운데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피부와 나이, 의복 등 사소한 차이가 만든 노인과 장애인, 다문화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다.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는 어쩌면 아직 세상에 쓰지 않은 이야기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아픈 소리가 난다.”

세상에는 가짜(fake)가 많다. 가짜 미소, 가짜 행복, 가짜 사랑, 가짜 우정, 그리고 가짜 공감도 있다. 거짓으로 속이는 일은 나쁘지만, 거짓에 속는 것도 어리석다. 조금 불편해 보일 수도 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포용과 공존의 길을 모색해보자는 것이 전시회 취지였는데 이태원로라는 특별한 장소성과도 합치되었다. 골목길 여행이란 대로에서 보지 못한 것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시도였다.

어느덧 다 왔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다. 진심 어린 위로와 공감은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힘들어도 이 순간을 이겨내야 한다. 함께 골목길을 걸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끝>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회. 권용주 작가의 <입을 공유하는 사람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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