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탄생

상상력의 끝까지 가본 뒤 ‘맥락’ 찾아 새로운 가능성 펼쳐

연극의 탄생 ② 신해연 작가가 들려주는 ‘희곡 쓰기’ 초반 작업

등록 : 2021-05-1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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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개인적 질문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동시대의 코드’와 연결하는 존재


초기에는 상상력 폭을 넓히는 게 중요

상상의 영역 아주 멀리까지 밀고 간 뒤

다양한 상상들 속 작가만의 맥락 찾고

연결 쉽지 않은 요소 이어 새로움 창작

국립극단의 지원형 작품개발 사업 ‘창작공감’의 작가 부문에 선정된 신해연 작가가 지난 3일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희곡 쓰기 초반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 작가는 “상상의 영역을 멀리 아주 멀리까지 가본 뒤, 뒤죽박죽 연결 되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 속에서 저만의 맥락을 찾아낸다”고 자신의 초반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


“사막으로 떠난 여자가 있어요. 그 여자는 무언가를 버리기 위해 아주 멀리 가기로 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죠. 그러나 여자는 그렇다면 더더욱 거기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직접 보고 싶다는 거죠.”

국립극단이 올해 지원형 작품개발 사업으로 진행하는 ‘창작공감’의 작가 부문에 지난 3월 말 선정된 신해연 작가가 최근 구상한 작품의 주요 모티프다. 신 작가는 오는 12월까지 국립극단의 체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이 모티프를 희곡으로 완성해나갈 예정이다.

신 작가는 최근 여러 차례 공모전 작가에 선정될 만큼 주목을 끄는 작가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드라마 대본과 희곡을 써온 그는 2013년 졸업 뒤 극단에 들어가 음향 오퍼, 조연출, 무대감독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러다 2016년 극단을 나와 본격적으로 공모전에 참여했다. 2016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창작희곡 낭독 쇼케이스’, 201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대표적 신진 예술가 지원사업인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차세대 열전’, 2018년 서울시극단 창작플랫폼, 2019년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그리고 2020년 국립극단의 ‘다시 여기 연극이 있습니다’ 등등 많은 프로그램에 선정되는 등 그는 누구보다 눈에 띄는 활동을 해왔다.

신 작가는 이렇게 여러 차례 공모전에 응모한 데 대해 “저는 극단 소속도 아니고, 같이 가는 연출이 있는 경우가 아니어서 작가를 위한 지원사업이 아니면 관객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며 “작품을 쓰고 관객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공모전에 지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시기마다 제가 감각하고 느끼는 것, 그래서 진짜 내 질문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따라가는 편”이라며 “그래서 가끔 스스로가 품이 작은 작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여러 차례 공모전에 선정된 데는 그의 희곡이 개인적인 질문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시대의 코드’를 갖추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듯하다. 개인의 질문에서 시작한 그의 글쓰기가 동시대의 코드로 연결되는 것은 어떤 메커니즘일까? 지난 3일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신 작가를 만나 창작 초기 과정에 대해 들었다. 창작공감 작가 부문에 같이 선정된 김도영·배해률 작가와 막 독서 스터디를 끝낸 뒤였다.

그는 작품의 시작에 대해 “선뜻 이해되지 않고, 또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나 순간들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 과정이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더라도, 그 불편함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끈질기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쁜 것을 피하지 않는 자세, 끈질기게 보는 태도를 통해 그의 작품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과 함께 사람들로 하여금 ‘바람직한 세상’을 그릴 수 있는 힘이 돼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힘을 더욱 키우기 위해, 극작 초반에 상상력의 폭을 넓히는 작업을 한다고 설명한다. 처음 떠오른 이미지에 계속 질문을 던지며 의미를 확장 시키고 꼬리를 무는 다른 상상들을 계속 키워 나간다.

이렇게 상상력의 폭을 넓힌 신 작가는 본격적인 구상에 들어갈 때면 “상상의 영역을 멀리 아주 멀리까지 가보려고 한다”.

신 작가는 이를 자신의 대표작인 <체액>(2020)을 들어 설명했다. <체액>은 불감증에 걸린 여자가 매일 밤 다한증 남자와 역할극 섹스를 하는 내용의 극이다.

“<체액>은 물기를 잃고 메말라서 부서져가는 사람들에서 출발했어요. 물기를 잃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계속 질문을 던지며 상상을 키워갔죠. 서로 부딪히면 부서질까 점점 거리를 두게 되고, 타인의 슬픔을 자극해 그 눈물로 내 목을 축이기도 하고요.”

그는 이렇게 상상의 영역을 확장 시킨 뒤, 그 안에서 나름의 연결고리를 찾는 과정을 거친다. “뒤죽박죽 연결 되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 속에서 저만의 맥락을 찾아내려고 해요. 쉽사리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이 만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이 펼쳐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는 어떤 작품이든지 이렇게 맥락을 찾고 본격적인 글쓰기에 들어가는 데까지는 ‘예열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 작가는 본격적인 글쓰기에 들어가는 것을 ‘예열의 시간을 거친 뒤 스위치가 켜지는 것’에 비유한다.

“언제 그 스위치가 켜질지 예측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쉽게 스위치가 켜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잘 안 켜져서 ‘이제 글렀구나’ 할 때야 비로소 켜지는 경우도 있어요. 그때를 맞이하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그는 이렇게 스위치가 켜지지 않은 시간 동안 느끼는 압박감이나 불안감도 그의 작품을 좀더 날카롭고 예민하게 만드는 작용을 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신 작가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시킬 완성된 희곡이 어떤 것일지, 초기 ‘사막을 걷는 여성’이라는 모티프와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벌써 그 완성본이 기다려진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멍청한’ 책읽기? ‘자유로운’ 책읽기!

“이 시간에는 기꺼이 멍청해져도 괜찮습니다.”

지난 3일 오후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회의실에서 창작공감 작가 부문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전영지 운영위원(사진 맨 오른쪽)이 말문을 열었다. 국립극단의 맞춤형 작품개발 사업인 창작공감 작가 부문에 선정된 신해연·김도영·배해률(왼쪽부터) 작가 앞에는 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장애를 가진 두 작가 김원영 변호사와 김초엽 소설가가 쓴 <사이보그가 되다>(사계절), 미국 장애운동가 겸 동물운동가인 수나 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오월의 봄)이 그것이다.

창작공감 작가 부문에 선정된 세 작가와 전영지 운영위원은 격주에 한 차례씩 자체 책모임을 열고 있다. 관심 있는 주제의 책을 서로 추천해 선정한 뒤 읽고 토론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기꺼이 ‘멍청’해진다. 기존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상상의 폭을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사실 세 사람이 쓰려는 희곡의 주제는 장애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의 확대와 자신과 사회에 대한 성찰은 희곡을 좀더 새롭고 알차게 만드는 기제가 될 듯하다.

글 김보근 선임기자, 사진 박승화 기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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