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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원대 칩’이 만든 탄자니아의 지속가능 전력 생활

⑰ 국제지속가능기술경진대회에서 배우는 적정기술의 조건

등록 : 2021-09-16 16:27 수정 : 2021-09-1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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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만 최고로 치는 ICT 혁명시대

저렴한 기술로도 주민 생활 향상 기여

가정 전력 측정기 없는 탄자니아 북부

과금 못해 지속적인 전력 생활 어려움

값싼 칩으로 사용량 측정 가능해지며

소득활동 시간 하루 2.5배 이상 늘어

‘첨단만 중시’ 선진 사회 시각 벗어나

‘적정기술 이용’ 개도국 개선 병행해야


한국-탄자니아 적정과학기술 거점센터가 2018년 2월부터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주의 음칼라마 마을에서 운영 중인 10kW급 태양광 발전 센터.

조개껍데기가 비소를 흡수한다? 미처 몰랐다. 지난 10일 서울대에서 열린 국제지속가능기술경진대회 참가팀의 발표를 듣기 전까지는. 이화여대 ‘지구를 구해조’ 팀은 방글라데시 치타공 해변에 버려지는 조개껍데기와 벤토나이트를 이용해 비소 처리 정화공을 만들겠다고 했다. 비소는 조선시대사약에 쓰인 독극물이고, 벤토나이트는 화산재가 바다의 해수와 함께 다져지며 재결정화되는 퇴적암 작용 때문에 형성된 점토광물이다.

“히말라야 암석에는 황화물(비소 함유량이 높은 암석)이 많은데요, 이것이 침식돼 지하수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비소에 노출된 지하수를 식수로쓰는 상황입니다. 약 13원의 정화공 1개로 최대 32.4L의 물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이 대회에서 ‘적정기술학회장상’을 받았다. 여기서 퀴즈. 아래 중 어느 팀의 아이디어가 적정기술에 해당할까?

3D 프린터로 제작한 백신 냉장 박스. 프린터 사양에 따라 재료비를 5달러대로 낮출 수 있는 적정기술 제품이다. 냉장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존 제품은 개당 50달러를 호가해 소득이 낮은 지역에선 보급되기 어렵다.

1번. 3디(D) 프린터가 있다면 어디에서든지 적정비용으로 출력할 수 있는 백신 운반용 상자의 설계도, 무선 모니터링을 통한 백신의 관리 및 유지 기술을 공유하겠다.(서울대 ‘3DP 백신케리어’ 팀)

2번. 바다에서 수거한 폐스티로폼의 염분과 이물질을 제거하는 기술로 고부가가치의 스티렌 모노머, 즉 스티로폼과 합성고무의 원료를 만들겠다.(전남대 ‘고래’ 팀)

3번. 바나나 줄기로 천연 섬유 복합체를만들어 자동차 내부 부품 등 플라스틱 제품을 대체하겠다.(독일 아헨공과대학 ‘바이오인테리오’ 팀)

힌트를 드리겠다. 적정기술학회장인 안성훈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적정기술의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는다. ‘지속가능성’, 즉 환경 파괴 없이 지속될 수 있는가. ‘지불 가능성’, 평범한 사람들의 소득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 ‘인간 중심’, 사람들에게 건강과 안전한 환경을 주는가. 일자리를 줄이거나 빼앗지는 않는가.

10일 서울대에서 온라인으로 열린 국제지속가능기술경진대회 본선. 한국·탄자니아·독일·프랑스 등 4개국에서 30개팀이 참가했다.

안 교수는 한국-탄자니아 글로벌문제해결 거점으로도 쓰이는 대학 내 기계공학부연구실에서 적정기술 사례 두 가지를 보여줬다. 탄자니아 오지에 적용된 ‘스마트 그리드’(지능형 전력망)와 한국의 공장 세 곳에서 실험 중인 ‘스마트 팩토리’(지능형 생산공장) 시스템이다. ‘최첨단’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듯한 두 분야에서 어떻게 적정기술이 나온 걸까.

적정 스마트 팩토리 개념도.

탄자니아 북쪽 응우루도토·음칼라마 지역엔 발전소뿐 아니라 전력망도 없었다. 집이나 생산시설에는 소비전력 측정기가 없었다. 전기료를 내고 전기를 쓰는 문화도 없었다. 농업 종사자 외엔 하루에 4시간만 일했다. 2012년 한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서울대 연구팀이 공적개발원조(ODA)를 이용해 태양광 발전소 3곳을 짓고 스마트 그리드를 깔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의 삶이 달라졌다. 휴대전화 충전 비용이 싸졌다. 밤에 쉽게 전등을 켤 수 있게 되자 소득활동을 하는 시간은 하루 10시간으로 2.5배 늘었다. 서비스등 3차 산업에 종사하는 가구의 소득은 세배 가까이 늘었다. 사람들은 전기를 쓸 수 있는 ‘크레디트’를 선불제로 사는 데 익숙해졌다. 동네 사람 한 명이 발전소 매니저를 맡고 전기요금과 발전소 시스템을 관리한다.

이를 위해 안 교수 팀은 현지에서 유지할 수있는 비용과 기술로 스마트 그리드를 짰다.

“저개발국에 태양광 독립 전력망을 깔면 보통 5년 정도 버팁니다. 사람들이 전기료, 관리비를 안 내니까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전기가 끊기죠. 그러면 삶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1만원대 저가 칩에 기반한 스마트 미터(전력측정기)를 집집마다 달아서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스마트미터는 가구별 전력 소비량을 발전소로 송신해줍니다. 덕분에 전기료를 낸 만큼 전기를 쓰는 체계를 만들 수 있게 됐죠.”

‘1만원대 저가 칩’의 활약은 한국의 중소기업 현장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안 교수 팀은 이 칩과 함께 작은 카메라, 그리고 경광등을 공장 내 절단장치에 달았다. 손가락 절단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장치다. 칩에는 알고리즘을 담았다. 그래서 카메라에 손가락 등 ‘기계가 아닌 다른 형상’이 잡히면 경광등이 번쩍인다. 작업자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다.

“사고는 보통 아차 하는 순간에 일어나요.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작업속도를 높이려고 안전장치를 풀어놔서, 협업하는 다른 사람이 실수해서 등등. 이런 일은 안전교육을 잘 받더라도 일어납니다. 교육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안성훈 적정기술학회장(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이 한국의 중소기업 3곳에 도입한 적정 스마트 팩토리 시스템을 설명하고 있다. ‘적정스마트 팩토리’란 중소기업의 인력 등 상황에 적정하게 설계된 지능형 생산공장이다. 안 교수는 이렇게 하면 제작할 때 제품과 장치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해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보기에 중소기업에 필요한 ‘적정기술’은 낮은 수준의 소프트웨어 그리고 다루기 쉬운 하드웨어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에는 인공지능 등 높은 수준의 소프트웨어를 다룰 수 있는 엔지니어도, 연산능력이 높은 컴퓨터도 없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도 상황이 비슷하다. 정보통신기술(ICT)과 인공지능·로봇기술의 발전으로 전세계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지만, 대부분의 저개발국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교수는 그런 지역들도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적정기술 아이디어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내다봤다.

“4차 산업혁명이 확산돼 선진국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이 쉬워지면 산업 구도가 확달라질 겁니다. 노동집약적 산업에 기반한 개발도상국의 산업은 타격을 받게 될 거예요. 4차 산업혁명 중에서도 일자리를 보전 할 수 있게, 기존의 노동력이 새로운 시대로 함께 건너갈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자, 이제 퀴즈로 돌아가자. 어떤 것이 적정기술일까?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 한국·탄자니아·독일·프랑스 등 4개국의 본선 출전팀들이 낸 30개 아이디어는 모두 지속가능기술, 즉 인류가 지구에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돕는 기술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정기술은 지속가능기술 중에서도 현지인의 ‘지불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 점까지 고려했을 때, 답은 1번이다.

적정기술의 개념을 창안한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1965년에 낸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이렇게 썼다. “기술의 주요임무는 인간이 생명을 보전하고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일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리라.” 그가 살아 있어 이 대회 심사를 봤다면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참가자 모두에게 상을 주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이경숙 과학스토리텔러

자문: 안성훈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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