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우리’

독립운동가·백제 모습 함께 느껴지는 중국의 입·출구

⑪ 상하이에서 본 ‘동북아 지중해’의 역사와 의미

등록 : 2021-10-0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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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황푸강 변 푸둥에 세워진 동방명주와 현대적 건물들. 건너편에는 19세기 서양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지중해는 유럽·아프리카의 역사 중심

양쯔강 하구, 동북아 역사 중심 중 하나

서양인 눈에 비친 작은 어촌 상하이는

한·중·일의 오랜 ‘관계의 역사’ 품은 곳

“윤봉길, 북한 사람이냐” 서양인 물음에

우리 분단 역사 너무 길다 새삼 느끼고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백제 땅 담로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간 것 마음 아파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의 지중해 관련 저술을 읽고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역사의 중심이 곧 지중해라는 것, 그리고 그 지중해가 그리도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이유는 바닷물에 영양분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반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와 중국 동부 해안이 면한 또 하나의 동북아시아 지중해를 생각해본다. 김용옥 교수는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라고 한다. 그러면 몽골 초원과 바이칼호에서 위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곳의 중심에 한반도가 놓인다. 왼쪽에 일본 열도, 오른쪽에 중국 산둥반도가 놓여 있다. 이렇게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볼 때 눈에 띄는 또 다른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양쯔강 하구이다.

양쯔강 하구에 있는 상하이 방문 계획은 그렇게 지도를 거꾸로 보면서 만들어졌다.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아편을 몰래 들여와서 일어난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영국에 상하이를 내주게 된다. 이전까지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하이는 그때부터 세계적인 대도시로 거듭난다.

서양의 시각으로 자그마한 어촌이라고 하지만, 상하이가 가진 역사 속 비중은 그리 작지 않았다고 본다. 난징과 쑤저우, 항저우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장보고의 신라방도 상하이와 그리 멀지 않은 장쑤성 화이안에 위치했다고 한다. 또 백제의 22담로가 요서지방과 한반도를 비롯해 일본 서부와 중국 동남부 해안지대까지 펼쳐졌다고 하니 바로 이곳 상하이도 그 일부가 되지 않았을까?

상하이(上海)는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밖에서 볼 때 상하이는 양쯔강 하류에 있는, 바다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상하이를 관통해 양쯔강으로 흘러가는 황푸강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20세기에 배를 타고 들어갔던 곳이다. 예전에는 장보고와 백제의 담로 행정관들도 아마 이 강물을 헤치고 중국 내륙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2015년 이후 여러 차례 찾은 상하이 여행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윤봉길 의거 장소인 훙커우공원을 중요한 방문 목적지로 정한 것도 그런 역사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훙커우(루신)공원 안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장소.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고 쓰인 돌. 그리고 그 옆에 윤봉길 의사에대한 생애와 업적이 중국어와 한국어로 쓰여 있다.

훙커우공원은 1950년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루쉰공원은 상당히 크다. 그 공원 안에 윤봉길 기념관이 있다.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던 장소에 바로 윤봉길 기념관이 세워졌다. 입구에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진 장소라고 적힌 기념돌이 서 있다. 입장료를 내고 기념관에 들어갔다. 윤 의사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마지막 총살 장면 사진도 전시돼 있다. 설명하는 안내 언어는 한자와 함께 한글이었다.

상하이 윤봉길 기념관. 현판에 윤봉길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전시관에는 우리 한국인 일행만 있는 줄 알았다. 기념관 밖의 루쉰공원은 중국인들이 산책하고 체조하는 모습으로 가득 찼으나, 이 동네에 사는 중국인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전시관 한쪽 구석에 북유럽에서 왔다는 서양인들이 있었다. 영어 안내문이 없는데 윤 의사에 대해 알 수 있을까 궁금히 여겨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윤봉길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아십니까?”

“중국 사람 아닌가요?”

“아닙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그래요?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런데 왜 상하이에서 일본과 싸웠나요?”

“그때는 우리가 나라를 잃어 이곳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했어요.”

“그럼 폭탄 던지는 걸 보니 윤봉길은 북한 사람이네요.”

“그때는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이니, 북한도 남한도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입니다.”

윤봉길 의사를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노르웨이인의 생각,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북한인지 남한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그들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우리의 분단이 오래됐구나’ 싶었다.

‘논리학이나 윤리학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이지만 역사철학에 대한 사유는 서로 다른 민족들과 문화공동체들에 의하여 아주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독일의 학자 리하르트 셰플러(1926~2019)가 <역사철학>(철학과현실사 펴냄, 1997)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상하이 개발과 함께 사라질 수도 있었으나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의 요청으로 옛 건물이 보존돼 있다. 바로 앞에는 주택가의 오래된 건물들이 있고 길을 건너면 화려한 백화점으로 대비되는 장면이 연출된다. 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방문한다. 너무나 초라하고 좁은 이 청사에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직접 사무를 보고 취침했다.

‘동북아 지중해’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중국이나 일본, 대만, 한국, 북한의 역사인식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서구의 역사철학의 하나인 실증주의, 법치주의, 마르크스주의, 탈민족주의 등을 가지고 와서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백제는…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중국의 <구당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서해를 건너 북쪽으로 향해 요서지방으로 진출하고, 서해를 가로질러 저장성 사오싱 지방으로, 남해를 지나 일본에 이르는 백제의 모습이 그려진다. 적어도 <구당서>에서 백제는 동북아 지중해를 가운데 둔 나라로 기억되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백제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원나라 역사서인 <원사>(元史)에는 7세기에 멸망했다는 백제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1271년부터 1368년까지 존속했던 원나라의 몽골인에게 백제는 여전히 실존하는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원사> 기록이 잘못됐거나 우리의 집단 기억이 잘못됐거나 둘 중 하나다.

중국 역사서 <양서>(梁書)에는 백제의 수도는 고마(固麻)라 하고 지방 읍은 담로(擔魯)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 담로가 22개나 있다고 한다. <구당서> 기록으로 보건대, 담로는 한반도뿐 아니라, 서일본과 동중국, 북중국에 걸쳐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담로의 어원은 여러 해석이 있다. 백제어 ‘다라’, ‘드르’의 음차로 성(城)을 뜻한다고도 하고, 드라비다어나 만주에 존재했던 길약족의 언어인 길약어에서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터키어에서 담(dam)이 ‘지붕, 옥상, 집’을 뜻하기도 한다. 일본 혼슈 효고현 아와지시를 한자로 쓰면 담로시(談路市)가 된다.

‘신천지’라 불리는 곳. 유럽풍의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서구식 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한 곳이다. 프랑스 조계지였는데 옛 건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박동욱 여행가

한·중·일 간의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백제가 동북아 지중해를 넘나들며 활동했던 공간임은 틀림없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육로로 해로로 드나들었던 상하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드나듦이 많았던, 그래서 상해(바다로 나아가고), 하륙(육지로 들어가는)했던 곳이었다. 이제는 상하이의 명물이 된 와이탄의 황푸강 변에서 유럽풍의 건물들과 휘황찬란한 야경 속에 공산당기가 휘날린다. 그러나 오래전, 그곳에는 어떤 다른 깃발이 휘날렸으리라.

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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