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년, 길을 묻다

“시니어에게 여행은 인생 반환점 ‘중간 급유’ 역할”

⑩ 여가 영역 첫 번째 이야기 고재열 여행감독

등록 : 2021-10-28 16:07 수정 : 2021-11-0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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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7일 종로구 북촌 한옥 갤러리 일백헌에서 고재열 여행감독이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생애 전환 시기의 여가,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MZ세대 소확행처럼, 여가·여행에서

맥락 있는 허비에도 과감히 도전해야

“좋아하는 거라면 허비도 의미 있어”

남이 좋다는 것보다 내 취향이 우선

여행 로드맵, 과식 말고 음미하게 짜야

순서 중요, 체력 될 때 힘든 여행부터

패키지에서 자유여행으로 차츰 이동


다양한 앱 활용, 여행력 키워나가야

혼자 여행에 창의활동 더하면 재밌어

여럿이 하는 여행, 좋은 만남의 계기

다른 생각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필요

‘은퇴 뒤 하고 싶은 것 1순위’로 많은 신중년이 여행을 꼽는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 ‘신중년의 사회참여 실태와 시사점’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전국 50~69살 신중년 4천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노후에 가장 하고 싶은 여가활동으로 ‘국내외 여행, 나들이’가 31.2%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고재열(46) 여행감독은 은퇴 뒤 여행에 관심 있다면 미리 준비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지난해 20년의 기자 생활을 접고 어른의 여행클럽 ‘트래블러스맵’을 만들었다. 10월7일 종로구 북촌 한옥 갤러리 일백헌에서 만나서 그에게 ‘여행감독’이 뭔지를 묻자 “영화처럼 주제가 있게 여행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좋은 인연을 남길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며 여행감독으로 나선 이유를 말했다. 여행을 기획하면서 그가 세운 여가에 대한 철학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면 허비하게 된다’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추구하는 엠제트(MZ)세대에서 허비의 맥락을 깨친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도 했다. 허비란 여백이 있는 소비로 평소의 씀씀이 수준을 넘어선 소비를 가리킨다. 그는 “여가와 여행 영역에서 가치 있는 경험이 꼭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라며 “신중년의 시기는 설령 비합리적이더라도 맥락이 있는 허비에 과감하게 도전할 때”라고 강조했다.

허비는 자신과의 대화에서 이뤄져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 남을 부러워할 일도, 시기할 일도 없어진다. 남이 좋다는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부터 생각하는 습관을 지니고, 여행, 음식 등 자신의 취향대로 고르는 것이다.

고 감독은 “여행 등 여가생활에서 가성비를 추구하는 무언의 압력을 스스로 주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거면 평소 씀씀이 이상의 허비를 해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다만, 한 번에 큰 행복을 얻으려 하는 ‘일확행’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평생 꿈꾸던 한옥을 시골에 대궐같이 짓는다든지, 국내 캠핑장에 맞지 않은 대형 캠핑카를 산다든지 하는 행동의 결과물은 행복이 아닌 골칫거리를 떠안게 되는 거라고 했다.

대개 신중년은 은퇴 뒤 보상받고 싶은 마음으로 여행부터 한다. 그동안 억눌렀던 것을 빨리 누리려 여행일정을 빡빡하게 짠다. 고 감독은 “뷔페에서 과식하듯 하지 말고 코스 요리를 음미하듯 자신의 여행을 맥락 있게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은퇴 뒤 여행 로드맵을 구체적으로 세우는 것부터 하고, 거기에 맞춰 여행자금 준비를 하라고 권했다.

여행할 곳의 순서를 정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약해졌을 때 오지 여행을 떠나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체력이 있을 때 좀 힘든 여행을 하는 것이 좋단다. 고 감독은 “패키지 관광에서 많이 가는 유명한 여행지들은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니 나중에 해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반복적으로 가는 자신의 여행지를 두는 것도 좋다”고 덧붙였다.

패키지여행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자유여행으로 바꿔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는 “패키지여행을 하더라도 한나절 정도는 혼자 무작정 헤매보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자신의 여행 취향을 알아가거나 확인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고 감독의 휴대전화엔 태양탐사선, 바다타임 등의 앱이 깔려 있다. 지형지물의 방향 잡기, 바다의 물때 알기 등에 활용한다. 산행에서 포인트별로 사진을 찍으면 궤적이 나오고, 동영상 기록이 만들어지는 앱(릴리브 등)도 애용한단다. 그는 “자유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다양한 여행 앱을 활용해보면서 여행력을 키워라”고 권했다.

‘혼자 하는 여행, 여럿이 하는 여행’ 각각 나름의 의미를 살리는 것도 좋다. 혼자서 하는 여행을 통해 자립성을 기르는 것은 신중년에게 필요하다. 혼자서 즐거운 상태를 갖는 것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고 감독은 “혼자 하는 여행은 가볍게 한 줄 글쓰기, 사진 찍기, 그림 그리기 등 창의적인 활동과 이어지면 더 재미있어진다”고 덧붙였다.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은 좋은 만남의 계기를 갖게 한다. 그는 인생 반환기를 맞은 신중년에게는 ‘중간 급유’가 필요한데, 인간관계의 보완도 그 가운데 하나로 본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 무르익은 뒤에 만난 사이다. 오랜 친구들은 편하지만, 서로를 예전 모습으로 평가한다. 무르익은 뒤에 만난 사람은 현재 모습을 보고 서로를 평가하기에, 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즐거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고 감독은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은 새로운 나를 실험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했다. 신중년은 여럿이 하는 여행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방식, 인연을 맺는 방식을 스스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그는 “여행이 의미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 안의 소년, 소녀 모습을 발견했느냐. 즉 천진난만했을 때의 자신을 느꼈느냐다”라고 덧붙였다.

인간관계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에서 만난 사이는 쉽게 친해지기도 하지만 쉽게 멀어지기도 한다. 혈연·지연·학연처럼 지속해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집착하면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열린 마음은 ‘여행에서 만난 느슨한 사이’ ‘간섭하지 않는 결속력’ ‘선을 넘지 않는 배려’ 등이다. 무조건 친해지는 것보다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배려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여행 친구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고 감독은 여행 계획을 짤 때는 명확한 콘셉트를 가지면서도 유연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예전 병법가가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살펴 유연한 작전을 세우듯, 기후 조건과 지형 조건 그리고 구성원의 특성에 맞게 유연한 여행을 진행하는 것이 좋다”며 “누구든 여행감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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