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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절 생각에 어려운 이웃 도와요”

17년째 배추 기부 이어온 성북구 삼선동의 홍기봉 식자재유통센터 대표

등록 : 2022-12-1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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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봉 성북구 삼선동 식자재유통센터 대표가 12월1일 매장 후문에 쌓아둔 수백 포기 배추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그는 성북구청 등에 17년째 배추를 기부해왔다. 그가 나눈 배추는 봉사자 손을 거쳐 어려운 이웃 1천여가구에 김장김치로 전해졌다.

초년고생 뒤 농산물매장 운영하며

해마다 5천~7천 포기 구청·동 기부

직접 재배, 유통 노하우 살려 지속

“나누어 마음 따뜻하면 행복해져”

12월1일 낮 성북구 삼선동 주민센터 맞은편 식자재유통센터. 평일 낮인데도 주말처럼 매장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후문 쪽엔 배추, 무, 과일 등 농산물 상자들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한 손님이 “농산물이 신선하고 저렴해 늘 여기 와서 산다”며 귀퉁이에서 배추 3포기씩 든 초록색 망을 뒤적였다. 홍기봉(60) 대표가 다가와 “이게 더 크고 좋네요”라며 같이 골라줬다.

홍 대표는 성북구청 여성가족과 공무원들에게 ‘배추 천사’로 불린다. 그는 2003년부터 해마다 김장철에 배추를 구청에 기부해왔다. 작황이 나빠 사업이 어려웠던 2년을 빼면 햇수로는 17년째다. 생배추 7천여 포기에서 4년 전부터는 절임배추 약 5천 포기로 나눔 활동을 이어왔다. 올해는 절임배추를 구청에 400상자(20㎏), 동 주민센터 등에 200상자 보냈다. 시가 2천여만원 상당이다. 그가 기부한 배추는 봉사자 손을 거쳐 지역의 소외계층 1천 가구에 김장김치로 보내졌다.

식자재유통센터 인근 홍 대표의 두 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공급하는 신선한 과일로 주스와 차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홍 대표는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인데 천사라는 표현이 어색하고 부담스럽다”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인터뷰도 여러 번 마다했는데 성북구청 담당자들이 설득해 이뤄졌다. 그는 선행상이나 감사패를 받은 적이 거의 없다. “매일 남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일 년에 겨우 한 번 하는 거로 얼굴을 내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거친 손에는 고단하게 살아온 흔적이 담겨 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20살에 단돈 4천원을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열흘이 채 되지 않아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중국집에 취직해 일하며 수타를 배웠다. 6개월 만에 독립해 영등포역 근처에서 포장마차를 했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돈이 모였다. 낮엔 손수레로 농산물을 팔러 다녔다. 하루 2~3시간 자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보는 안목이 키워졌다. 10여년 만인 1997년 중구에 농산물 판매가게를 마련했다.

홍 대표는 “먹고살 만해지니 주위를 둘러보게 됐다”며 “힘들었던 시절 생각에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었다”고 했다. 농산물을 유통하는 일을 하니 배추를 기부해, 봉사자들이 김치를 담가 이웃에게 나눠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구청을 찾아 제안해 한 해 기부했다.

이듬해 외환위기 한파로 그 역시 호된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이 먹는 거에도 지갑을 닫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가 한동안 이어져 견뎌내야 했다. 2000년에 판매장을 성북구로 옮겼고, 3년 지나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성북구청에 제안해 나눔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농산물 판매장 앞에 선 홍기봉 대표.

가격 변동 폭이 큰 배추 수천 포기 기부를 어떻게 20년 가까이 이어올 수 있었을까? 홍 대표는 “강원과 충남 등에서 직접 재배하고 그동안 쌓은 농산물 유통 경험으로 가격 변동에 잘 대처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여름이 지나면 배추 기부 계획을 미리 세운다. 절임 공장도 사전 협의해 일정을 잡아둔다. 성북구청 여성가족과와도 미리 연락한다. 배춧값이 ‘금값’이 되면 담당자들이 오히려 걱정을 태산같이 하지만 그는 ‘당연히 해야 한다’며 늘 안심시켜준다.

그의 나눔 활동에는 아내와 딸들의 지지와 응원도 한몫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가족이 반대하면 이어가기 어려운 법이다. 그는 “가족들이 함께 마음을 내줘 늘 고맙다”고 했다. 홍 대표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따듯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누면 마음이 행복해진다”고 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욕심내지 말자고 마음을 다스려왔다”며 “지갑을 열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신조로 살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그는 크고 작은 농산물유통센터를 3개 운영하고 있다. 직원도 1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이들에게도 나눔을 강조하고 기부나 봉사활동을 권한다. “어려운 사람들도 우리 농산물을 사 가는 손님들이니 고마워하고 나누기도 해야 한다고 자주 얘기한다”고 말했다.

홍 대표는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키우는 것이 즐겁고 소비자에게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더 즐겁단다. 농산물 유통을 천직이라 여기며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하고 싶어 한다. 그는 “언제까지 하겠다고 정한 건 없지만 업을 하는 한 배추 기부를 이어갈 생각이다”라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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