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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다리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끝에 예술의전당이 보인다.
서울 시내로 들어오는 육로교통의 허브라면 단연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다. 정식 명칭은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지만 통상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라 부르는 이곳으로 서부경남 지역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버스가 들어온다. 인근에 꽃 도매상부터 백화점, 지하상가까지 상업시설이 즐비해 내국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유동인구가 많다. 그런데 이곳이(정확히는 잠원동 일대지만)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뽕나무밭이었다니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다. 상전벽해다.
과거 이 일대가 뽕나무밭이었음을 알려주듯, 고속터미널에서 서초역 방면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강남성모병원 사이 반포대로 8차선 도로 위에는 하얀 누에 형상을 한 육교가 놓여 있다. 누에다리다. 조선 초기부터 이 지역에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해 뽕나무 묘목을 보급하고 잠업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다 사라지고 누에다리 옆에 뽕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다. 팻말에 ‘6월 개화, 흰색 꽃이 핀다’고 적혀 있는데, 뽕나무꽃이 어떻게 생겼더라? 문득 궁금해진다. 산행하다보면 평소엔 무심했던 수목에 관심이 생긴다. 산 아래에선 빠르고 분주하게 일상이 돌아가지만, 산을 오르면 눈을 자연에 두게 된다. 달게 잔 낮잠처럼 자연은 사람에게 기운을 준다. 뽕나무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6월에 다시 와서 확인해봐야겠다.
이 ‘누에다리’를 기준으로 양쪽 모두를 서리풀공원이라 부르는데, 한쪽으로는 몽마르뜨공원을 거쳐 서래마을로 이어지고, 반대편으로 가면 서초 법조타운까지 펼쳐지는 제법 큰 녹지공간이다. 하지만 이름에 ‘산’이 아니라 ‘공원’이라 붙였듯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절경이랄 것도 없다. 그러니 이 산을 보자고 찾아오는 외지인도 거의 없어 말 그대로 동네 주민들의 뒷산 정도라 생각하면 되겠다. 하지만 1970년대 국군정보사령부가 있었다는 이유로 개발이 제한돼, 덕분에 질 좋은 녹지가 보존돼 있다는 점은 서리풀공원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저 신던 신발에 무리하지 않고 올라도 깊은 숲속에 온 듯한 느낌을 주니 서울 안에 이만한 곳도 드물다.
몽마르뜨공원
몽마르뜨공원은 누에다리와 붙어 있는데, 인접한 서래마을에 프랑스인이 많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아담한 잔디밭과 시계탑,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에 대한 기록,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기욤 아폴리네르나 아르튀르 랭보 같은 20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를 새겨 놓은 조형물이 곳곳에 있다. 씩씩하게 산길을 걸어 올라왔으니 몽마르뜨공원에선 시 한 편 감상하며 잠시 속도를 늦추도록 하자.
그때 문득 내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 토끼가 왜 없지? 몽마르뜨공원에서 토끼를 마주치는 게 얼마나 즐거웠는데, 그러고 보니 토끼를 못 본 지 한두 해가 지난 것 같다.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서 우연히 만난 야생 공작이나 사람을 겁내지 않고 다가오던 그랜드캐니언의 사슴처럼, 우리에 가두지 않은 동물을 일상에서 만난다는 건 꽤 신나고 설레는 일이다. 대체 몽마르뜨공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많던 토끼는 다 어디로 갔을까?
알아보니 과번식으로 인한 개체 수 증가, 추가적인 유기, 고양이의 공격 등 여러 이유로 동물보호단체와 협의해 보호소로 이관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이 잘 알아서 결정한 일이겠지만 더는 토끼를 볼 수 없다니 내심 섭섭하다. 도심 안에 이렇게 잘 가꿔진 숲이 존재하고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뒷산에 여우 살고 산길에서 족제비를 만나는 옛날이야기 같은 일이 실현될 수 있으려나?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무도회’를 본떠 만든 조형물과 시계탑
산책을 마칠 무렵 서래마을로 내려오든 내방역 쪽으로 내려오든 ‘빵지순례’의 마을답게 어디로 가도 맛있는 빵집을 만날 수 있는 건 서리풀공원이 주는 또 다른 재미다. 따뜻한 커피에 달콤한 마카롱 하나면 그 순간만큼은 남부러울 것이 없다. 아직 봄을 말하기엔 이른 계절. 2월은 삭막하다. 수목은 생기를 잃었고 대기의 색도 탁하다. 바람에 달랑거리는 이파리는 건드리면 바사삭 부서질 것만 같다. 나무도 아직 새순을 올리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우듬지는 이미 초록빛이 들었다. 몇 번 더 매서운 추위가 닥쳐오겠지만, 저 가느다란 초록 가지 덕분에 나는 곧 봄이 올 것을 믿는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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