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형 찾동·나비남 프로젝트…복지 사각지대 좁히기 보람”

다산의 힘, 구정의 완성ㅣ김수영 양천구청장

등록 : 2018-11-08 15:18 수정 : 2018-11-0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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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구에서 사상 첫 재선 구청장

보수적 지역서 61% 높은 득표율

양천구청장이던 남편 중도 하차

대신 출마하며 정계 입문

서울시 찾동 1년 앞서서 양천형 실시

중·장년 독거남 세상과 마주하기

나비남 프로젝트로 ‘주목’

민선 7기 일자리 창출 분야 주력할 터


김수영 양천구청장이 목동 유수지(지상은 주차장 시설)가 내려다보이는 인근 공사장 옥상에서 양천구 일자리 창출을 위한 개발 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김 구청장은 “목동 유수지 지상에 중소기업 혁신성장 밸리를 마련해 중소·벤처기업 전문 마케팅과 유통 공간을 만들 계획”이라며 “지난 10월 문을 연 중소기업유통센터 서울 청년창업사관학교와 연계해, 많은 창업가가 사업하기 좋은 터전을 만들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행정 지원을 적극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김수영(54) 양천구청장은 양천구 30년 사상 첫 재선 구청장이다. 4년 전 양천구 사상 첫 여성 구청장으로 임기를 시작한 그는 “고발-사퇴-재·보선을 반복해온 역대 양천구청장의 ‘흑역사’를 끝내고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정상적인 구정으로 복귀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61%의 높은 득표율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그는 첫 임기 동안 구축한 행정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그동안 미뤄온 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는 “주민들이 원하는 양천의 숙원 사업과 개발 과제를 4년 동안 착실히 진행해 양천구 30년 미래의 초석을 놓겠다”고 다짐했다.

어려움을 딛고 초선에 성공한 뒤 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지난 선거를 돌아본다면?

“양천구는 그동안 전임 구청장들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는 등 정말 부침이 많았다. 오죽하면 구가 생긴 뒤 한 번도 재선한 구청장이 나오지 않았겠나? 그래서 4년 전 취임할 때 단단히 결심했다. 꼭 양천의 이 부끄러운 흑역사를 내 손으로 끝장내고 말겠다고. 그런 각오로 지난 4년간 저와 우리 직원들이 열심히 뛰었고, 그 결과가 압도적인 재선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주민들에게 제 마음과 노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

61% 득표했다. 만족할 만한가?

“물론이다. 알다시피 양천은 서울에서 강남 3구 다음으로 보수적인 투표 성향을 보여온 곳이다. 이런 지역에서 제 임기 동안에 28년 만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2016년 20대 국회 양천갑 황희 의원)이 배출됐고, 저도 구청장선거에서 61% 표를 받았다. 60%대 지지는 양천구 선거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대단한 지지를 보내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조금 아쉽다면, 재건축 등 부동산 문제의 영향으로 목동에서 제가 기대한 만큼의 표를 얻지 못한 일이다.”

이번 선거에서 여성 구청장이 세 분 당선됐다. 평소 여성의 정치 활동을 주장하고 여성 리더십을 많이 강조하는데.

“제가 정당에서 일할 때 여성국장을 맡았고, 민주당에서 처음으로 여성리더십센터를 만들었다. 그동안 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정치 무대보다는 주로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저는 정당에서 직접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는 일도 중요하다고 봤다. 정당에서 배출된 능력 있고 내구성이 강한 여성 리더십이 여성 정치의 주류를 형성해야 남녀평등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김 구청장도 양천구청장 출마가 아니었어도 결국 정치를 했을 것 같다. 

“아마도 그랬을 거다. 저를 잘 모르는 분들은 제가 그저 남편을 대신해 선거에 나온 사람(김 구청장은 남편 이제학 전 양천구청장의 중도 사퇴로 치러진 재선거에 출마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정도로 기억하는데, 사실 그런 건 아니다. 원래 저는 30대 후반 무렵부터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다. 언젠가는 선출직 도전을 거쳐 궁극적으로 국회에 진출하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남편 사건은 정말 억울했지만,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저는 저대로 정치를 시작했을 거다.”

학생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높았나?   

“문학평론가가 되고 싶어 국문과에 갔고, 학생운동 할 때도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한 것이지 정치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 등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사회에 나와서도 활동을 그쪽으로 했고, 먼저 제도 정치권에 들어간 선배들도 있고 해서 자연스레 정당이나 정치 쪽으로 몸과 관심이 옮겨갔다.”

사회복지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소 복지 분야에 관심이 많았나?

“당에서 일을 하다보니 여러 가지 정치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노무현 정부 때 정부 부처에서 일하면서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복지 정책을 몰라서는 안 되겠다 싶어 개인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생산적 복지 활동으로서 사회적 기업에 관심이 가서 그것으로 박사까지 하게 됐다. 저는 제 학비 제가 다 내면서 공부했다. 제가 필요한 공부였으니까 돈을 들여서라도 열심히 하게 되더라.” (그는 최근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한 2018아시아미래포럼에서 양천구 내 사회적 경제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적 금융 지역기금 조성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임기 동안 한 일 중 자랑할 만한 ‘업적’을 꼽는다면.

“복지 정책으로 박사 과정을 한 만큼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주력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찾아가는 복지’였다. 양천구 18개동 전체에 방문복지팀과 평생건강센터를 설치해 ‘양천형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서울시가 시작한 찾동 사업보다 1년 앞선 것이어서 더욱 자부심을 느낀다. 20여 년간 복지 업무를 담당한 사회복지직 공무원에게서 ‘서류 신청만 받다가 직접 방문해 일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뿌듯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나비남 프로젝트’도 주목해주기 바란다. 패자 부활이 어려운 사회 양극화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딛고 재기가 가능한 사회구조 마련이 시급하다. 그래서 50대 독거남의 재활 문제를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50~64살 독거 남성들을 사회 공동체 안으로 다시 이끄는 사업인데, 전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다.

‘나비남’은 ‘나는 혼자 사는 남자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우리 구에서는 총 428가구가 사회와 단절된 채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병원, 복지관, 금융권 등 32개 기관으로 구성된 ‘50대 독거남 지원협의체’가 구성됐고, 주민 75명으로 이루어진 ‘나비남 멘토단’, 일자리 상담을 해주는 ‘50스타트센터’도 문을 열었다. 처음엔 나오기 주저하던 나비남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이 들린다.”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만 소개해달라.

“민선 7기의 비전을 ‘YES 양천, NEXT 30’에 담았다. ‘젊고(Y) 친환경적이고(E) 스마트한(S)’ YES 양천을 만들기 위해 먼저 일자리 창출 부분에 주력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 유치를 위한 기반 조성과 사업하기 좋은 도시 환경 조성이 필수 과제다. 이를 위해 목동 유수지 일대에 중소기업 혁신성장 밸리를 만들어 중소·벤처기업 전문 마케팅과 유통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지난 10월 목동 유수지 인근에 서울 청년창업사관학교(중소벤처기업부 산하)가 문을 열었다. 많은 창업가가 사업하기 좋은 터전을 만들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행정 지원을 적극 해나가겠다. 현재 주차장, 대형마트 임대 등으로 쓰는 목동 중심축 상업지구에 기업을 유치하거나, 매각하더라도 일자리 관련 산업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다. 이에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진흥공단 등 중앙부처, 서울시와 민간 기업들과도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가시적인 성과물을 만들어낼 계획이다.”

재선에 성공했으니 앞으로 3선도 있고, 또 다른 정치적 진로도 열릴 수 있다. 정치적 비전이나 포부가 있다면?

“우리 양천구에도 그동안 미뤄온 과제, 숙원 사업이 많다. 재선하고 나니 서울시, 중앙정부, 각종 기관과 손발을 맞춰 일할 환경이 마련되는 것 같다. 일자리 창출 등 여러 개발 과제에 손을 댈 여력도 확보됐다. 이제는 그 일을 할 때가 됐다. 저는 일하는 게 너무 좋다. 제 앞의 과제를 모두 해내고 싶다. 임기 내에 안 되면 다음 임기에 하고, 그래도 남은 일은 그것이 완성되어가는 과정까지 주민들에게 보고드리고 물러나도 물러나야 하지 않겠나. 그다음 일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 잘하다보면 길은 저절로 열릴 테니, 그때까지는 뽑아준 주민들에게 저의 최선을 바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이대 총학생회장 출신…강단 있는 복지 전문가

△민선6기 양천구청장 당선(2014) △민주당 여성리더십센터 부소장(2014)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2012~2014) △여성가족부 여성희망일터지원본부장(2006~2008) △열린우리당 여성국장(2004~2006)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집시법 위반 집행유예(1986) △서울 금란여고, 이화여대 국문과, 숭실대대학원 사회복지행정(박사) △1964년 서울 출생, 남편 이제학(전 양천구청장)씨와 1남.

61%의 높은 지지율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재선 구청장이지만, 7년 전 김수영(54) 양천구청장의 정치적 출발은 암울했다. 2010년 민선 5기 지방선거에서 남편 이제학씨가 양천구청장에 당선됐으나 1년 만에 중도 사퇴한 것이다. 대선 주자의 한 사람인 손학규 현 바른미래당 대표의 측근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미래가 활짝 열린 듯했다가 추락한 셈이었다. 설상가상,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김 구청장이 대타로 나선 재선거에서 또 패배하면서 시쳇말로 “두 번 죽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 사건으로 부부가 받은 충격과 좌절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 구청장은 2년 뒤 남편 쪽이 당시 선거에서 제기했던 상대 후보의 고문 수사 의혹이 결국 사실로 밝혀지면서 정치적 활로를 찾기 시작해, 2014년 민선 6기 양천구청장에 당선되면서 지역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당시 그의 승리는 일종의 ‘사필귀정’으로 화제를 모았고, 다시 이번 선거 승리로 양천구 최초의 재선 구청장이 되었다.

남편을 대신해 나왔다는 그의 표면적인 정치 진출 과정이나, 부드럽고 고운 외모로만 보면 내조형 여성이라고 속단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그는 남편과 별개로 독자적인 정치 진출을 준비하던 정치 지망생이었다.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살이(집시법 위반)까지 한 강단을 갖고 있다. 정당에 들어가 여성국장, 여성리더십센터 부소장 등 여성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지원하거나 실천했다. 30대 후반에는 거주지인 양천에서 시의원 출마를 시도하는 등 정치 진출 이력도 있다. 그 자신도 “남편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때가 되면 어떤 형태로든 선출직에 도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고를 거쳐 문학평론가를 꿈꾸며 여대 국문과에 진학했으나 당시의 의식 있는 학생들이 그랬듯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사회에 나와서는 정치권에 진출한 선배들을 따라 제도 정치권에 들어왔다. 정당에서 일하면서 사회복지 정책 쪽으로 관심 분야를 넓혀 사회적 기업에 관한 연구로 박사까지 됐다. 서강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같은 운동권 출신 남편 이씨와는 학생운동을 하다 만나서 부부가 됐다.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자 친구들은 “연대 사업이 연애 사업으로 빠졌다”는 농담으로 축하 인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나를 있게 한 이것

편지 꽃병, “힘들 때마다 들여다본다”

첫 당선 후 2년째 되던 날 지지자들이 찾아와 놓고간 사랑의 편지들이다. 꽃병을 만들어 사무실 책상에 가까이 두고 힘들 때마다 들여다보며 힘을 얻는다. ‘축하한다’ ‘사랑한다’ ‘감사한다’는 응원의 말은 늘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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