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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척돔에 안전과 안심을 입히다

등록 : 2019-04-18 15:29 수정 : 2019-04-19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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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주위 벽면·계단·바닥에 노란색과 직관적 픽토그램

서울디자인재단·서울시설공단 ‘안전안심 디자인’ 선보여

지난 3일 구로구 고척동 고척스카이돔 4층 내야석 27번 출입구에 ‘안전안심 디자인’을 함께 입힌 송재명 서울디자인재단 책임(오른쪽)과 이기형 서울시설공단 주임이 서 있다. 연회색이라 눈에 띄지 않는 다른 출입구와 달리 노란색 벽면에 밖으로 나가는 모양의 사람 그림(픽토그램)이 그려져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지난 3일 오후 구로구 고척동 고척스카이돔 4층 내야석으로 들어서자 한가운데 있는 27번 출입구(게이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출입구는 좌석·복도와 비슷한 연회색인데 혼자만 샛노랬다. 27번 출입구 위아래 복도까지 노란색이어서 출입구를 향해 길이 난 느낌이었다. 다른 출입구 벽은 아무런 표식 없이 텅 비어 있었는데, 이곳에는 밖으로 나가는 모양의 사람 그림(픽토그램)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어 출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관중들이 일제히 퇴장할 때 출입구 위쪽에서는 사람들 사이로 출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바닥에 띠처럼 표시된 화살표만 따라가면 출입구가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전 상황에 대비해 출입구에 설치한 조명은 비상 상황에 자동으로 불을 밝혀,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몰라 당황할 일은 없어 보였다.

층만 표시했던 중간 계단에 픽토그램으로 출구 방향을 명확히 표시했다.

아이트래커 조사 결과, 여기저기 분산됐던 시선이 바닥 화살표에 집중됐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최근 프로야구를 개막한 고척스카이돔에 서울디자인재단과 서울시설공단이 함께 입힌 ‘안전안심 디자인’이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디자인재단 송재명 디자인사업팀 책임은 “2017년 말 충북 제천스포츠센터, 2018년 초 경남 밀양병원 등에서 잇따라 난 불로 막대한 인명 피해가 생긴 뒤 고척스카이돔 안전안심 디자인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2015년 11월 문을 연 고척스카이돔은 한국 최초의 돔 야구장으로, 야구 경기에는 최대 1만7천 명, 공연에는 최대 3만5천 명까지 들어올 수 있는 대형 시설이다. 이기형 서울시설공단 돔경기장운영처 주임은 “개방된 일반 야구장과 달리 지붕을 씌운 갇힌 공간이라, 비상 상황으로 암흑이 됐을 때 수만 명의 이용객이 당황하지 않고 흐름 있게 대피할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두 기관의 태스크포스팀은 지난해 6월 사업을 시작하면서 먼저 문제점 파악에 들어갔다. 고척스카이돔을 이용한 시민 100명에게 설문조사했더니 화재에 안전하다고 답변한 시민은 46%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넘치는 인파로 인한 압사 사고(52%)를 가장 우려했다. 내부 이해관계자 워크숍, 보안업체 안전 담당자 인터뷰, 구로소방서 직원 워크숍, 전문가 심층 인터뷰 등을 거쳐 △좁고 가파른 계단 △압사 위험이 큰 공간 △찾기 어려운 출입구 위치 △시선 방향에 맞지 않는 안내물(사인)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좌석 지도 등의 문제점을 파악했다. 송 주임은 “처음 고척스카이돔에 와서 보니까 규정대로 있을 건 다 있는데, 연회색의 출입구처럼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실제 비상 상황이 벌어지면 문제가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대구, 광주 등 최근 개장한 다른 야구장을 다니며 조사한 이 주임은 돔 야구장과 일반 야구장의 특성이 달라 참고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밖으로 노출된 야구장에서는 기둥만 봐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정표나 안내물을 규정보다 훨씬 더 많이 설치해놓은 고척스카이돔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다. 돔 구장이 하나 더 있었으면 비교하기 좋았을 텐데 유일무이하다보니 어려운 점이 있었다.” 고척스카이돔의 좌석 지도가 불편한 면이 있다고 판단하고 개선 방향을 찾던 송 주임은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담당자에게 좌석 지도를 어떻게 디자인했냐고 물었다가 오히려 고척스카이돔을 벤치마킹했다는 답변을 듣기도 했다. 전국의 다른 대형 시설들이 기준으로 삼는 고척스카이돔에 선도적인 ‘안전안심 디자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태스크포스팀은 디자인 방향을 △일관성 있는 색상 △누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랜드마크 등으로 정했다.

형형색색 소화기 ‘랜드마크’로 시선·안전 다 잡아

“바닥 표시만 따라가니 출구 나와”

대피로 찾기 효율성 20.3% 개선

지난 3일 구로구 고척동 고척스카이돔 통로 벽면에 설치한 ‘랜드마크 소화기 존’에서 송재명 서울디자인재단 책임 (왼쪽)과 이기형 서울시설공단 주임이 독특한 디자인의 소화기를 들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고척스카이돔처럼 원형으로 된 대형 건물에는 랜드마크가 될 만한 공간이 하나쯤 있어야 위기 상황에 도움이 되고 평상시에도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계단과 연결된 통로 벽면에 노란색 ‘랜드마크 소화기 존’을 만들어 형형색색의 소화기 9개를 한꺼번에 두었다. 송 책임은 “평범한 빨간 소화기만 있으면 지나가는 이용객이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와 이쁜데!’라는 인상을 줘 화재 때도 기억이 날 수 있게 했다”며 “대형시설 화재는 소화기 하나로 끌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 법적 규정에 따라 20~25m 간격으로 소화기를 하나씩 두는 것보다 집중 배치해 여러 사람이 일제히 진화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면까지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시선의 위치와 움직임을 추적하는 ‘아이트래커’ 장비를 이용해 일반인 9명의 시선을 추적 조사한 결과, 안전안심 디자인 적용 뒤 탈출 소요 시간, 시선 고정 횟수, 시선 고정 시간 등 대피로를 찾아가는 효율성이 평균 20.3%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소화기의 위치를 인지한 사람은 개선 전 1명에서 개선 뒤 5명으로 5배 늘어났다. 참가자들은 “강렬한 노란색이 눈에 띄어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어지고 이해가 빨라졌다” “픽토그램을 보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능했다” “탈출 경로를 바닥 띠로 표시해서 그냥 따라가면 돼 마음이 편했다” 등 눈에 잘 띄는 노란색과 바닥 화살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지난 2월27일 고척스카이돔에서는 ‘마룬파이브’(마룬5)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안전안심 디자인으로 바꾼 뒤 처음 열린 대형 행사로 2만 명이 좌석을 가득 채웠다. 이기형 주임은 “기존에는 경기나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출구를 둘러싼 계단을 내려오다 눈에 들어오는 옆 출구로 빠지는 바람에 다른 관객들과 얽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룬파이브 공연이 끝난 뒤에는 관객 대부분 바닥에 표시된 동선을 따라가 그런 현상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현재 고척스카이돔 안전안심 디자인은 1단계 시범사업으로 경사도가 가장 높은 내야석 4층 일부만 입힌 상태다. 서울시설공단은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다른 출입구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예산과 일정 문제로 적용하지 못한 참신한 아이디어도 기다리고 있다. 이 주임은 돔 지붕에 프로젝터를 설치해 비상 상황으로 암전이 되면 게이트 방향으로 대형 화살표를 투사해 출구를 안내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송재명 책임은 “서울시설공단과 서울디자인재단은 기관의 속성 자체가 다르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단 편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데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제시해준 덕분에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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