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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내 방 얻고서야 사회인 자각”…노숙인 출신 여성의 고백

등록 : 2019-08-0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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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안 객원기자 르포 주거 취약자들의 서울살이 上

여성 노숙인 생활 탈출한 김진주씨의 서울 주거 연대기

7월29일 아침 김진주씨 방에 들어갔다. 김씨는 “내게 서울살이란 내 방과 방세 낼 돈을 구하는 일”이라며 “방은 삶이 다 묻어나니까 쉽게 누구를 들이기 부끄럽다”고 말했다. 김씨는 방이 생긴 후 어린 시절 취미였던 인형 수집을 다시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매물’이자 ‘계급’이다. 누군가에겐 ‘최소 기본권’이다. 오늘날 서울의 ‘방’을 가리키는 단어는 다양하다. 서울 쪽방촌에 사는 김진주(56·가명)씨에게는 ‘방’이 인생 회복을 향한 ‘첫 단추’였다. 김씨가 자신의 서울살이와 ‘방 연대기’를 풀었다. ‘쪽방 출신’이라 밝히면서, 그런 경력이 사회 속에서 편견 없이 인정받을 날을 꿈꾼다고 했다.

“쪽방에 떨어지는 건 주사위 게임 같아요”

김진주씨는 나이 쉰이 되던 2013년께 경상도 산골에서 서울로 왔다. 가방도 없이 빈손이었다. 실패한 결혼 생활과 시댁에서 받은 학대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지만 그게 병인지 몰랐다. 거리 불빛에 의지해 시멘트 바닥에서 먹고 잤다. 옷이 해지고 몸이 굳었다.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었죠” 행인들이 ‘노숙인’이라 괄시할 때, 같은 거리에서 커피 파는 외눈박이 여인의 방 한켠에 몸을 누인 적이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 경험한 첫 번째 방이었다. 비좁고 더러웠다. “동업하자는데, 도덕적이지 못한 환경이란 직감이 들었어요. 물들지 말아야지 싶더라고요.”

거리로 돌아가 이듬해까지 노숙 생활을 하다가 동네 토박이인 재향군인 출신 할아버지에게 ‘쪽방’을 소개받았다. “할배가 ‘여자들이 이렇게 거리에서 살면 안 된다’며 손목을 잡고 끌고가요. 나를 어디로 팔아버리려나 싶어 무서웠는데 알고보니 나처럼 뭣 모르고 노숙하는 여자들을 쪽방상담소로 연결해주는 분이었어요. 거리엔 그런 일에 통달한 분들이 계시거든요. 내가 받을 수 있는 지원을 줄줄 꿰셨죠.” 김씨는 쪽방촌에서 한 평 반짜리 방을 얻었다.


서울 출신인 김씨는 “부유한 가정, 물정 모르는 셋째 딸”로 태어났다고 했다. 스무 살 갓 넘어 결혼해 남편 고향으로 떠났으나 신체·언어적 폭력에 10여 년 노출되는 동안 “머리가 고장나며” 정신병이 났을 즈음 이혼하고 산골로 숨었다. 10여 년을 더 고립돼 살다가 “행복한 유년 시절이 있는 고향 동네로 돌아가자고 결심”하고, 마지막 희망을 찾아 서울로 온 참이었다.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해 움직이던 1980년대 서울을 떠났어요. 30여 년 만에 서울에 왔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지하철 노선은 많고, 사회는 감도 안 잡혀요. 서울에서 쪽방으로 떨어지는 건 주사위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인생이란 주사위를 던졌고 구르다가 ‘쪽방’이란 면에 당첨된 거예요. 그저 한순간이었죠. 가난이 그렇게 찾아왔더라고요.”

‘폭염경보’보다 두려웠던 ‘허술한 문고리’

쪽방촌에서 보증금 없는 월세 25만원짜리 방을 소개받았다. 바깥에선 ‘주거 최후의 전선’, 현장에선 ‘막장 인생의 똥밭’이라 하며 자조했지만, 김진주씨는 쪽방 문을 여는 순간 “감격했다”고 한다. “정말 대통령 계시는 청와대 부럽지 않았어요. (웃음) 거리에서 눈비 다 맞으며 고통스럽게 살다가, 지붕 있는 ‘내 방’이 생겼으니 말이죠. 내 다리를 펴고 눕는 내 방.”

방과 더불어 ‘주소’를 받으니 전입신고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 등을 통해 ‘월세 낼 수 있는 환경’이 뒤따랐다. “주민센터에서 ‘긴급지원’이라고 했던 말 생각나요. 쪽방상담소에 가면 ‘사회복지’한다는 선생님들 계시잖아요? 날마다 ‘뭐 필요한 거 없느냐’ ‘배우고 싶은 것 없느냐’ 당장 필요한 물품을 세심하게 챙겨줬어요.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니… 나중엔 ‘보답하고 싶다’ 마음이 들더라고요.” 겉돌던 몸과 마음이 해를 거듭하며 서서히 풀렸다.

전세자금으로 얻은 9평 빌라 속 안정…“방이 인생 회복 기초” 실감

2013년 경상도 산골에서 서울행

거리 불빛 속 시멘트 바닥서 1년

주변 도움으로 시작한 쪽방생활도

매일 밤 문 흔드는 남성 탓 ‘공포'

서울 쪽방촌의 밤

문제는 밤에 터졌다. “쪽방촌에 막 들어온 여성들은 티가 나요.” 쪽방에 입주한 첫날밤부터 “아줌마, 나랑 놀자”며 정체 모를 남성들이 돌아가며 문을 쳐댔다. 헐거운 문고리를 붙잡고 덜덜 떨며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대략 한 건물 한 층에 남성 9~10명이 입주하면 여성 1~2명이 섞여 있었다. 거리를 떠돌 땐 도망갈 수 있지만 밀폐된 방에선 그러지도 못했다. 방을 옮겨도 같았다. 남자만 보면 숨었다. 목소리를 죽이는 일이 습관이 됐다.

“폭염이나 혹한, 외로움 같은 건 그럭저럭 참을 수 있어요. 상담소에 가면 선풍기, 담요, 옷, 쌀, 기본 소통 등 지원이 있어요. 그런데 ‘공포’는 못 견디는 거예요. 혼자 사는 여자들에게 쪽방의 밤은 무섭죠. 쪽방 살던 한 여자가 새벽에 죽어나갔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남 일이 아니었어요.” 2년을 견디다가 새벽에 괴한과 승강이를 벌인 후 경찰서로 달려갔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구세군에서 긴급 전세 자금을 대출받아 9평 남짓한 1960~70년대식 빌라를 얻었다. “낡아서 언제 부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전해요. 공동화장실이 아니라 내 화장실이 생겨 편하게 샤워할 수 있어 기뻤고요. 한 달에 대출 이자 20만원을 내는데, 날짜 어긴 적 한 번도 없어요. ‘사람대우’ 받고 마음이 안정되니까 그제야 다시 뇌가 활동하는 거예요.”

김씨는 ‘안전한 방’을 가진 쉰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사회인이라 느꼈다”고 말했다. “이제 자격증 따서 돈 벌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서 벗어나 고운 할머니로 늙는게 꿈”이라고 했다.

‘안전한 방’에 딸려온 ‘사람대우’와 ‘내 목소리’

김진주씨가 거듭 말했던 ‘사람대우’를 요약하면 ‘주거권’이다. ‘내 방’이 준 안정감을 바탕으로 쪽방상담소를 통한 유대감 형성, 지속적 교육, 인격적 대우를 이룬 김씨는 “나 쪽방촌 출신이다. 교육받고 있다. 나아지고 있다”는 말을 주문처럼 하루에도 몇 차례 외운다고 했다.

“당당해지려고요. 쪽방 주소지를 가졌던 사람은 언제든 쪽방상담소에서 컴퓨터나 예술 같은 무료교육이랑 긴급지원(쌀·물 등)을 받을 수 있는데, 이게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에요. 쪽방에서 간신히 벗어나도 사는 환경이 바뀌진 않죠. 이런 무료교육 등은 안심해라, 계속 품어준다는 의미잖아요? 올해 ‘향초반’ ‘음악반’ 수업에 참여한 쪽방촌 여자들 보세요. 사는 게 빈곤해도 방에 향기가 생기고, 악기를 들이니까 웃잖아요. 사람이 일단 사람대우를 받으면 뇌가 돌아오는 것 같아요.”

김씨는 ‘뇌가 돌아온다’는 말을 자주 했다. 김씨는 지난 일요일 동네 교회에서 책상을 하나 얻었다며 펴보였다. “내 방에서 공부할 수 있어 가장 기뻐요. 이제 내 목소리도 찾아 가야죠.”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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