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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 걸을 이유, 하나 더 늘었다

등록 : 2019-09-19 16:21 수정 : 2019-09-2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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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선임기자의 ‘강남구가 조성한 양재천 흙 산책길’ 1.1㎞ 르포

안양천·중랑천·성북천도 ‘더 걷기 좋은 하천’으로 변신 중

강남구 개포동 주민 유지연(42)씨가 지난 8월30일 자신의 두 아들 송준우(6)·윤우(4)군과 함께 양재천 산책길에서 늦여름 햇살을 즐기며 걷고 있다. 저 멀리 우뚝 솟은 타워팰리스가 보인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지난 8월28일 저녁 5시께 강남구 양재천 영동2교 근처 흙 산책길. 맨발로 땅을 지르밟으며 걷기에 열중인 50대 여성을 발견하고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걸으면서 하면 안 되겠나”는 답이 돌아왔다. 흙의 감촉을 계속 느끼며 걷는 것에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읽혔다.

김도연(54)씨라고 밝힌 여성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이곳을 찾을 정도로 산책길에 푹 빠져 있었다. 강남구가 지난 7월 양재천 영동 2교와 4교 구간 강둑 1.1㎞ 구간에 새 산책길을 만든 뒤, 일주일에 서너 번 저녁 무렵이면 이곳을 걷는다고 한다. “집은 역삼동이어서 네 정거장쯤 떨어져 있고, 근처에 분가한 딸이 살아 자주 나와요.”

평소 걷기를 좋아하는데, 이곳을 걷다보면 명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다고 한다. “여기 물소리 좀 들어보세요. 물소리를 듣고 바람에 억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 맨발로 걷다보면 저절로 명상의 시간이 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스팔트 등으로 포장된 기존의 양재천 산책길과 달리 꽃창포·붓꽃 등 풀꽃 10만 포기를 심어놓은 산책길은 구간마다 다양한 표정으로 걷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타워팰리스가 우뚝 솟아 있는 도심 바로 옆에서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흙길이 뿜어내는 정취는 인간의 원초적 걷기 욕망을 자극하는 듯하다.

강남구는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이 구간을 1차 경관 개선 사업 대상으로 정해 오염된 흙·모래를 제거하고, 강변에서 잘 자라는 식물을 심어 호박돌길·코스모스길·물억새길 등 옹기종기 다양한 형태의 산책길을 만들었다.

근처에 사는 김지호(9)군도 틈만 나면 잠자리채를 들고 산책길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고 했다. “무엇보다 잠자리가 많아서 너무 좋아요. 일주일에 이틀 빼고 매일 나와요. 보통은 할머니하고 나오는데 오늘은 저만 나왔어요.” 자기 방 안에 틀어박혀 게임 삼매경에 빠지거나, 학원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태반인 현실에서 생태계가 살아 있는 산책로를 마당 삼아 뛰어노는 아이를 만난 건 뜻밖이었다.

강남구 역삼동에 사는 김도연(54)씨가 지난 8월28일 오후 5시께 강남구 양재천에 새로 조성된 1.1 km 흙길을 맨발로 걸으며 산책을 즐기고 있다. 김씨는 매주 서너번 저녁무렵에 이곳을 걷다보면 명상을 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사진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양재천 흙길에서 만난 김지호(9)군은 잠자리채를 들고 산책길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사진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아이 옆을 70대 노인이 반려견을 데리고 느릿느릿 석양을 즐기며 지나갔다. 자전거 길과 공용이어서 보행자와 충돌할 위험이 큰 아스팔트 산책길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앞의 김씨는 “지금 시간대는 산책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나 저녁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나온다”고 했다.

강남구는 이달 초 2차 경관 개선 사업 계획을 확정 짓고 다양한 문화시설과 편의 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다. 양재천로 메타세쿼이아길인 영동4교와 영동5교 사이 구간에 맨발로 흙을 밟을 수 있는 황톳길 900m도 추가한다. 또한 밀미리다리 안개분수를 비롯해 산책길에 음향기기를 설치하고 화장실과 음수대, 전망 쉼터 등 편의 시설도 추가로 배치한다.

1970년대 말 강남 개발과 함께 직선 하천으로 만든 뒤 크게 오염된 양재천은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쳐 이제 생태 복원 하천 국내 1호로 환골탈태했다. 1995년 자연형 하천(5급수 판정), 1998년 자전거길과 산책길 조성, 1999년 친수 공간 조성(2급수 판정), 2001년 학여울 생태공원 조성 등을 거쳐 2012년 자연 생태 복원과 문화휴식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강남구에 따르면 하루 산책 인구 7천 명, 자전거 이용자 6천 명에 이를 만큼 강남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강남구 쪽 양재천에서는 15개의 생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돼 올 상반기에만 5700여 명이 참가했다.

영동2교를 지나면 서초구가 관할하는 양재천(약 4.14㎞)이 나타난다. 서초구도 양재천 주변 산책로 가꾸기에 애를 쏟고 있다. 강남구가 생태 하천을 살리는 자연 친화적 산책길 조성에 주안점을 뒀다면, 서초구는 밤의 볼거리에 역점을 둔 듯하다.


서초구, 관할 양재천에 ‘낮보다 아름다운 밤 풍경’ 조성

구로구, 2022년까지 43억여원 들여

안양천 일대 ‘수목원 수준’으로

성북구, 성북천에 생태 하천길 조성

주민 찾는 대표 도심 하천 꾸며

서초구는 칸트의 산책길, 아이리스원 등 양재천 명소에 조명 넣은 쿨링포그를 설치했다. 서초구 제공

서초구는 ‘양재천 산책길에 만나는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산책길을 새로 단장했다. 양재천 매헌다리에 가로 42m, 높이 2m 크기의 ‘미디어글라스’를설치해 해넘이 이후 산책길로 시민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양재천 영동1교와 영동2교 사이 200m에 이르는 장미터널도 눈길을 끈다. 사계장미 650그루를 심은 터널로 일루미네이션 조명이 밤하늘의 은하수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양재천의 명소인 ‘칸트의 산책길’을 지나자 수백 종 풀꽃이 어우러진 ‘아이리스원’ 일대에 갑자기 차가운 하얀 안개가 뿜어져나와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철 구조물에서 하얀 안개를 뿜어내는 ‘쿨링포그’ 십여 대 아래 막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아버지랑 여기저기 뛰어나니며 놀고 있었다.

병약한 남편과 바람 쐬러 가끔 나온다는 문정숙(76)씨는 “시원하니 좋긴 하지만 전기세가 얼마나 많이 나오겠어요”라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서초구 입구 쪽에도 좌석과 무대를 갖춘 인공 수변무대가 눈에 띈다.

서초구는 이달부터 14인승 전기셔틀버스를 타고 양재천을 따라 영동2교~주암교 6㎞를 천천히 돌며 다양한 생태 체험을 하는 ‘양재천 천천 투어’를 운영한다.

서울시 7개 구와 경기도 6개 시를 거쳐 가는 안양천(총 길이 32.5㎞)도 과거 오염 하천의 대명사였으나, 관련 지자체의 노력에 힘입어 지금은 3급수로 회복되면서 주민들의 휴식·녹지·운동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구로구는 민선 7기 이후 2018년 7월부터2022년 6월까지 43억여원을 들여 안양천 일대를 수목원 수준의 자연 휴식 공간으로 꾸미는 사업을 하고 있다. 올해 진행 중인 세부사업을 보면 광명대교~신청교(약 3.7㎞) 장미정원 장미터널, 고척교~오금교 1㎞ 산책로, 안양천 오금교 북단 1만8천㎡ 생태 초화원 등을 조성하고 있다.

양천구는 3억8천만원을 들여 지난 3월부터 안양천 안 조명등 531개 등 중 307개 등을 전체 절전형 LED 등기구로 교체해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야간 산책로로 만들었다.

2010년 새롭게 꾸민 성북구 정릉천 산책로(1.64㎞)와 성북천 산책로(2.51㎞)도 사시사철 주민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 도심 생태 하천길이다. 성북구는 지난 8월24일 정릉 개울섬(정릉 대우푸르지오아파트, 정릉 성원상떼빌아파트 앞)에서 출발해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성북구민 걷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화가 이중섭, 소설가 박경리, 시인 신경림, 조각가 최만린 등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예술혼을 가다듬었던 유서깊은 산책길이다.

동대문구, 광진구, 중랑구 등 여러 구에 걸쳐 있는 중랑천에도 걷기 좋은 산책길이 곳곳에 있다. 동대문구는 중랑천 둑 벚꽃길 일대 900m에 지난 7~8월 LED 조명을 야외 갤러리 20곳에 설치했다. 또 둑길에 카페를 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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