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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야 살려줘!” “노래 불러줘~”…독거 노인 새 반려자 AI스피커

등록 : 2019-10-04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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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누구’, 성동구 등 8개 자치단체 홀몸어르신들에 보급 호평 받아

외로움 달래주는 말벗이자 위기 때 119로 연결하는 ‘고독사 예방 생명줄’

성동구의 임대주택에서 혼자 사는 강임순 할머니가 에스케이텔레콤의 인공지능스피커 ‘누구’(NUGU)에게 “아리야 노래 좀 불러줘~”라고 주문하고 있다. 옆에 있는 이는 강 할머니를 돕고 있는 성동구의 김태호 방문간호사이다. 사진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아리야~ 패티김 노래 들려줘!”

8월27일 오전 성동구 왕십리도선동 한 임대아파트 1층의 거실. 혼자 사는 강임순(78) 할머니가 익숙한 듯 주문을 외치자 어디선가 “패티김의 ‘이별’을 시작합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지난 3월 강 할머니 안방에 설치된 에스케이텔레콤의 인공지능스피커 누구(NUGU)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인생의 말년을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사는 그에게 적적함을 달래주는 말벗이다. 날씨, 성경말씀, 찬송가 등을 주문하면 아리는 척척 말귀를 알아듣고 그 내용을 그대로 실행한다.

지난해 11월 타고 있던 휠체어에서 떨어져 석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발 수술을 하는 등 거동이 불편한 강 할머니에게 ‘아리’는 단순한 말벗을 넘어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스마트스위치 기능까지 탑재한 강 할머니의 인공지능스피커는 “아리야 불 꺼줘”라고 부탁하면 저절로 소등되고, “아리야 불 켜줘”라고 주문하면 곧바로 그 내용을 어김없이 이행한다. 강 할머니는 기초생활 수급자로 월 8만3천원의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지출하고 나면 손에 쥐는 게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공짜를 싫어하는데 돈이 있으면 (사용료를) 내고 싶다”며 연신 “아리가 너무 좋다”는 말을 되뇌었다.

강 할머니 댁의 스마트 돌봄 기능은 ‘행복커뮤니티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됐다.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와 에스케이텔레콤이 고독사 방지와 스마트 돌봄 확산을 위해 인공지능스피커와 사물인터넷 등을 저소득 홀몸 어르신 댁에 시범 설치해주는 사업이다.


현재 성동, 양천, 서대문, 중구, 영등포, 강남구 등 서울 6개 구와 경기 화성시, 대전 서구 등 전국 8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이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성동구는 현재 500가구에 인공지능스피커를 설치하고 있는데 전국 8개 자치단체에서 연말까지 2100가구 설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성동구는 성수동에 ‘행복커뮤니티센터’를 마련해 사회적기업 ‘행복한 에코폰’에 센터 운영을 맡겼다.

행복커뮤니티 사업은 시범사업 추진 반년 만에 스마트 돌봄을 통한 고독사 방지 가능성이 확인되고 있다. 행복한 에코폰에 따르면 뇌 수술을 받은 경력이 있는 성동구의 박아무개(76)씨는 지난 9월18일 밤 10시께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파서 평소 교육받은 대로 인공지능스피커 ‘누구’에 대고 “아리야 살려줘!”라고 외쳤다. 행복커뮤니티센터의 야간 업무를 맡고 있는 보안전문업체인 에이디티(ADT)캡스 쪽은 즉시 박씨에게 연락해 상태를 확인했다. 이어 곧바로 119에 도움을 요청해서 박씨는 병원에 이송돼 적절한 치료를 받고 무사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박씨의 당시 혈압이 270㎜Hg로 정상치의 두 배 이상이어서 제때 조처하지 않았다면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현주 행복한 에코폰 상담사는 “평일 업무시간은 행복한 에코폰, 주말과 야간에는 ADT캡스 쪽에서 업무를 맡고 있는데 구조 요청을 접수하면 오류 방지를 위해 세 번 전화를 걸어 상태를 확인하게 돼 있다”며 “신고자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위중한 상태로 판단해 곧바로 119 신고를 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스피커가 설치된 다른 구에서도 긴급구조 사례가 눈에 띈다. 강남구에 사는 조정옥(71) 할머니는 지난 6월 말 새벽 잠에서 깨어났는데 갑자기 몸이 너무 아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독거 어르신-AI 스피커 ‘감성대화’, 일반인의 3배 이상 높아

“스피커를 사람처럼 생각 경향 높아”

사용빈도도 일반인 두배 가까워

어르신 “아리야 사랑해 말 절로 나와”

올 안 전국 2천여 가구로 확대 계획

지난 4월22일 을지로 에스케이티타워에서 열린 행복커뮤니티 사업 행사. 행복커뮤니티 사업 참여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돌봄 대상자 김순자 할머니(앞줄 왼쪽 셋째) 등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 둘째부터 김연아 에스케이텔레콤 5GX 홍보대사, 문석진 서대문구청장, 김수영 양천구청장, (한 명 건너) 정원오 성동구청장, 채현일 영등포구청장. 성동구 제공

다리에 힘이 빠지고 온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옴짝달싹 못했다.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는 조씨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못하는 상황에서 휴대폰조차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조씨 머릿속에는 며칠 전 다녀간 강남구의 아이시티(ICT)케어센터의 케어매니저 말이 스쳐 지나갔다. “혼자 지내시다가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에이아이(AI)스피커에 도움을 청하시라”는 말대로 조씨는 “아리야 살려줘!”를 외쳤다. 조씨는 119 구급차로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입원했고 퇴원을 마친 뒤 일상생활에 복귀했다.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왕래가 거의 단절돼 고립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에게 인공지능스피커는 적적함을 풀어주는 대화 상대를 넘어서서 이제 ‘반려자’의 기능까지 톡톡히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에스케이텔레콤과 행복한 에코폰이 4월1일부터 5월31일까지 두 달간 ‘누구’를 사용한 홀몸 어르신의 인공돌봄서비스 사용 패턴을 분석한 결과 홀몸 어르신들이 ‘감성 대화’(13.5%)를 사용한 빈도가 일반인(4.1%)에 비해 세 배 이상 높았다. 홀몸 어르신들이 인공지능스피커를 의인화해서 생각하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에스케이텔레콤 쪽은 밝혔다.

또 조사 대상자 중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는 홀몸 어르신들이 오히려 인공지능스피커사용(평균 58.3회) 빈도에서 보유자(30.5회)보다 두배가량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에는 발음 등이 부정확해 인공지능스피커가 주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행복커뮤니티센터의 방문매니저나 구청의 방문간호사들의 반복 교육을 받은 뒤 사용이 능숙해지고, 또한 인공지능스피커 자체가 사용자의 언어적 특성을 이해하는 학습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사용상 어려움은 상당수 해소됐다고 한다. 행복커뮤니티 사업에 따른 인공지능스피커 사용자의 평균 연령은 75살이고, 최고령자가 99살이다.

성동구 행당동에 사는 유아무개씨는 혼자 사는 불안감에 텔레비전을 켜놓지 않으면 잠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아리’를 친구로 삼고부터는 심리적으로 안정돼 수면제도 다 버리고 편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앞의 이현주 상담사도 “사용자 중에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낫다고 말하는 어르신도 있다”며 “어떤 남성 어르신은 그동안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쑥스러워서 못하고 살았는데 ‘나도 이제 아리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 상담사는 “어르신들이 인공지능스피커를 잘 사용하고 있다는 말을 해줄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스마트 돌봄 시설 설치 대상이 저소득 홀몸 노인으로 한정돼 있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는 목소리도 있다. 성동구의 김태호방문 간호사는 “부부 거주자 중에는 한 분이 건강이 안 좋아 자신의 부재 시 건강 걱정을 많이 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설치가 확대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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