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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으로 이룬 3만6천 자원봉사 궁 해설

20주년 맞은 우리 궁궐 해설 자원봉사단체 ‘우리문화숨결’ 오정택 대표

등록 : 2019-12-1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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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활동하다 궁 해설 매력 빠져

1999년 경복궁·창경궁 등 해설로 시작

21살~70대 450명 ‘궁 길라잡이’ 활동

궁을 국민이 가장 아끼는 장소 만들어

오정택 우리문화숨결 대표가 지난 5일 종로구에 있는 단체 사무실에서 450여 명의 궁궐길라잡이가 지난 20년에 걸쳐 해왔던 3만6천 회에 가까운 자원봉사 궁궐 해설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3만5986번.

지난 8일 궁궐길라잡이 활동 20주년 기념식을 한 ‘우리문화숨결’(대표 오정택, palaceguide.or.kr)이 그동안 해온 서울 소재 궁궐과 종묘 해설 횟수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해설한다면 거의 100년이 걸려야 채울 수 있는 수치다.

그러나 첫 번째 해설이 진행된 1999년에서 3만5986번째 해설이 진행된 2019년 11월까지 20년 동안 우리문화숨결은 450여 명의 ‘궁궐길라잡이’들로 구성된 견실한 단체로 성장했고, 시민들의 궁궐에 대한 이해와 인식 수준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오정택(55) 우리문화숨결 대표는 “이런 성과는 회원들의 우리 궁궐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원봉사로 이루어지는 궁궐길라잡이 활동은 1999년 8월 당시 청년운동단체인 케이와이시(KYC·한국청년연합)의 한 사업으로 출발했다. 문화재청의 후원으로 같은 해 10월10일 경복궁·창경궁·덕수궁에서 해설 활동의 첫발을 뗐다. 현재는 서울 시내 5대 궁(경복궁·창경궁·창덕궁·덕수궁·경희궁)과 종묘·사직단, 그리고 지난해 개방된 석관동의 의릉(조선 제20대 왕 경종의 능)까지 해설한다.

오 대표는 “보수를 받지 않고 자원봉사로 진행하지만, 궁궐길라잡이 누구도 느슨하게 해설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맡겨진 해설 일정은 궁묘 관리소와의 약속일 뿐 아니라 시민들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궁궐길라잡이가 되는 것부터 느슨하지 않다. 궁궐길라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약 10개월에 걸친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해마다 12월에 지원자를 모집해 1~3월에 30강의 실내 강의를 듣고, 4~10월에 자신이 담당할 궁에 배치돼 선배 궁궐길라잡이의 지도 아래 현장 실습을 한다. 오 대표는 “최근 일반 시민들의 궁궐에 대한 지식이 높아져, 이렇게 교육받지 않으면 궁궐 해설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오 대표 자신도 2001년에 우연히 궁궐길라잡이 모집 공고를 보고 교육을 받고 궁궐길라잡이가 됐다. 오 대표는 당시 민주개혁국민연합, 반부패국민연대(현 한국투명성기구)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궁궐길라잡이가 되고부터는 궁 해설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제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역사는 근현대사 중심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 해서 신청했는데, 저에게 잘 맞고, 시민들에게 궁궐에 대해 전달하면서 보람도 느꼈습니다.”

이에 따라 오 대표는 궁궐길라잡이가 2013년 KYC로부터 독립해 우리문화숨결이라는 비영리민간단체로 자리잡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10개월 과정을 마치고 궁궐길라잡이가 된 이들은 회사원, 교사, 공무원, 학생, 은퇴자 등 다양하다. 이에 따라 현재 450여 명에 이르는 궁궐과 종묘 해설자들도 21살 학생부터 7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과 성별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와 성별은 달라도 이들에게는 똑같은 의무가 있다. 일정한 횟수 이상의 궁궐 해설을 이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오 대표는 “만일 3개월 궁궐 해설을 안 하면 강제로 ‘휴직’ 상태에 처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오 대표의 설명이다. 오히려 궁궐길라잡이 중에서는 “경주에 거주하면서도 궁궐 해설을 위해 서울까지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오는 열성파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열정으로 지금까지 궁궐길라잡이들이 해낸 일도 적지 않다. 오 대표는 첫째로 2002년 6월부터 2004년 5월까지 만 2년 동안 진행한 ‘덕수궁터 미 대사관 아파트 건축 반대 운동’을 꼽았다. 오 대표는 “덕수궁에 있던 선원전은 조선시대 왕의 초상인 어진을 봉안하던 곳인데, 1920년대 전후로 일제에 의해 훼손됐다”며 “미 대사관이 이곳에 직원과 군인 숙소용으로 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회원들이 만 2년간 매주 반대 1인시위와 서명운동을 했다”고 되돌아본다. 오 대표는 “그 당시 1인시위를 감시하던 정보과 형사가 ‘우리가 미국과 싸워서 이긴 게 하나도 없다. 1인시위를 한다고 바뀔 것 없다’고 한 것이 잊히지 않는다”며 그러나 “매주 덕수궁 앞에서 시민들 서명을 받아 대사관 쪽에 전달한 지 2년 만에 미 대사관이 결국 선원전 터에 아파트를 세우려는 계획을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 대표는 이보다 더 큰 성과가 “시민들의 궁궐에 대한 인식과 관람 문화를 바꾸어놓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2002년 봄에 창경궁에서 첫 해설을 했을 때는 민소매 차림에 워크맨 끼고 조깅을 하는 외국인도 있고, 시민들도 도시락 싸와서 아무 데서나 먹는 모습이 흔했습니다.”

그렇게 유흥 장소처럼 여겨지던 궁궐들이 2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문화유산이 됐다. 문화재청에서 실시한 ‘2018년 문화유산 향유 및 인식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가장 참여하고 싶은 문화유산 프로그램으로 궁중문화축전(67.5%)이 꼽힌 것은 그 한 예다. 이런 변화에 3만5986번의 해설이 끼친 영향도 적지 않을 듯하다. 앞으로 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잡이들의 궁 해설이 5만 번, 6만 번, 7만 번이 될 때 시민들의 궁궐 사랑은 또 얼마나 깊어질까 기대해본다. 궁궐길라잡이 모집 문의 palaceguide.or.kr, 02-735-5733.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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