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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안마사의 따뜻한 봉사…“손끝에서 자부심 느껴져”

등록 : 2019-12-2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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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맹학교 재활과 수료생들, 데이케어센터 등에서 어르신 안마 봉사

종로장애인복지관과 함께 진행…“일상에서 받은 도움 돌려줘 기뻐”

지난 18일 오후 중구 구립중림어르신데이케어센터에서 서울맹학교 재활과 수료생 김준현씨가 동기생 네 명과 함께 어르신들에게 안마 봉사를 하고 있다. 종로장애인복지관이 에스케이텔레콤(SKT) 구성원 급여 끝전 모으기 후원금을 받아 맹학교와 지난 11월부터 인근 어르신데이케어센터를 20여 회 찾아 300여 명에게 서비스했다. 내년에도 봉사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김준현(40)씨는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이다. 어릴 때는 누구보다 건강했다. 헬스트레이너를 할 정도로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20대 때 갑자기 밤이면 시력이 나빠졌다. 처음에는 야맹증 정도로 가볍게 여겼는데 결국 희귀성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았다. 3년 전이었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면서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김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늘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기에 절망에 빠져 바닥만 헤매고 있을 수 없었다. 앞을 볼 수 없어도 잘할 수 있는 일 ‘안마’를 배우기 위해 국립 특수학교인 서울맹학교 이료(수기치료)재활과에 들어갔다. 지난 2년간 2천 시간의 과정을 마치고 내년이면 정식 안마사가 된다.

지난 11월부터 김씨는 재활과를 수료한 동기생들과, 학교와 종로장애인복지관이 함께 하는 안마 봉사를 나간다. 주 2~3회 종로구나 인근 자치구에 있는 서울형 데이케어센터를 찾는다. 데이케어센터는 서울시 인증 기준을 맞춰 하루에 일정 시간 목욕, 식사, 치매 관리 등을 하는 어르신 돌봄 시설이다. 그간 약 20회 300명 정도의 어르신에게 안마 봉사를 했다.

이들이 참여하는 안마 봉사는 에스케이텔레콤(SKT) 구성원의 급여 끝전 모으기 후원(3천만원)을 받아 운영하는 ‘찾아가는 안마 서비스 더 돌봄’ 프로그램이다.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에게 이웃 사랑을 전하고, 시각장애인의 재활과 사회 참여를 지원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접점을 넓혀나간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올해 마지막 안마 봉사는 18일 오후 중구 구립중림어르신데이케어센터에서 했다. 이날 봉사는 김씨와 네 명(김태경·김명준·양윤선·최선영)의 동기생이 함께했다. 간이침대 5개가 놓인 방에서 이들은 남색 유니폼을 입고 침대에 누운 어르신들의 팔다리, 어깨 등을 꼼꼼하게 안마했다. 30분 동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무르고, 쓸고, 누르고, 떨고, 두드리고, 잡아당기는 등 운동을 시켜줬다. 잠시 쉰 뒤 두 번째 팀의 어르신들이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무릎과 다리 통증으로 힘든 윤삼례(92) 할머니는 김씨가 기를 모아 종아리를 꾹꾹 누르자 연신 “아이고! 시원하다”고 한다. 어깻죽지의 뭉친 근육을 정성스레 풀어주자 나른한지 할머니의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선잠에서 눈을 뜬 할머니는 “시원하게 잘 주무르네”라며 칭찬한다. 할머니의 칭찬에 김씨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전신 안마가 끝난 뒤 방을 나서면서 윤 할머니는 “아이고 고맙다”며 한 번 더 인사했다.

안마 봉사에 참여한 재활과 수료생들은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김태경씨는 대학 1학년 때 장애 판정을 받은 뒤 자립을 위해 안마를 배웠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일상에서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는데, 안마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김명준씨 역시 그간 여러 길을 걸어오다 안마를 배웠다. 전국체전 시각장애인 축구 선수이기도 한 김씨는 “집에서 부모님에게도 해드리고 밖에 나와서는 이렇게 어르신들에게 해드린다”며 “안마사 직업에 자부심도 느낀다”고 했다.

안마 봉사는 이들에게 살아갈 힘과 위안을 준다. 최선영씨는 고등학교 때 황반변성을 앓아 장애를 얻었다. 일반대학을 졸업했지만 비장애인들과의 경쟁이 힘들어 맹학교를 지원했다. 최씨는 “안마 배우는 게 힘들어 많이 울기도 했다”며 “봉사하면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고맙다고 사탕도 주고 손도 잡아줘 힘이 난다”고 했다. 10여 년 전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고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양윤선씨는 “어르신들이 해주는 인생 얘기들을 들으면 힘든 일도 끝이 있다는 걸 느끼고, ‘다 지나가고 우리도 살아낼 수 있겠구나’라는 위안도 받는다”고 했다.

이번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종로장애인복지관의 이희문 직업재활사는 “어르신들이 집에 돌아가서 안마 봉사를 잘 받았다고 자랑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며 “데이케어센터 공간이 좁아 안마 서비스를 받고 싶은 어르신들에게 충분하게 못해 드리는 게 아쉽다”고 했다. ‘찾아가는 안마 봉사 더 돌봄’은 후원금 예산 안에서 새해에도 운영된다.

서울에는 현재 시각장애인이 4만2천 명 있다. 이 가운데 3300명 정도 안마 자격증을 갖고 있다. 이들은 안마원과 안마시술소, 헬스 키퍼(사내 안마사) 근무지인 관공서나 기업체, 노인과 중증장애인에게 무료로 안마 서비스를 제공하는 안마사 파견 사업, 안마의료봉사단 등에서 활동한다. 채춘호 종로장애인복지관 직업지원팀장은 “안마사는 현행 의료법상 시각장애인만 할 수 있는데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며 “이번 봉사가 시각장애 안마사에 대한 인식 개선에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연 서대문지회 회원들, 10년째 안마봉사 이어와

장애인센터 생기면서 더 안정적 운영

강서지회 회원도 쉼터 마련 감사 행사

“도움 줄 수 있어 보람되고, 위안받아”

19일 오후 서대문구 홍제동 영광시각장애인주간보호센터 교육실에서 시각장애 안마사 네 명이 이웃들에게 안마 봉사를 하고 있다. 영광시각장애인주간보호센터 제공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지역 회원들이나 지회가 안마 봉사를 펼치기도 한다. 서대문지회는 회원들이 뜻을 모아 안마 봉사를 10년째 이어오고 있다.

19일 오후 서대문구 홍제동 영광시각장애인주간보호센터의 10평 남짓한 교육실에서 4명의 시각장애 안마사가 봉사했다. 중장년 층 2명과 청년 2명이다. 동네 어르신, 장애인 등 몸이 불편한 10여 명이 안마 봉사를 받으러 센터를 찾았다. 평소 주간보호센터 이용자들이 프로그램 활동을 하는 곳이라 침대를 놓을 수 없어 매트를 깔고 해 다소 불편해보였지만 봉사자들은 개의치 않고 정성을 다했다. 한 사람마다 20~30분 전신 안마를 했다.

박광재 센터장은 2010년 당시 서대문지회 회장을 맡아 뜻 맞는 회원 대여섯 명과 함께 ‘찾아가는 안마 봉사’를 시작했다. 그는 10대에 시력을 잃은 중도 시각장애인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사회복지학 석사를 마치고 안마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박 센터장은 “시각장애로 어쩔 수 없이 사회에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안마로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주로 노인복지관, 장애인 시설, 요양원 등을 찾았다.

지난해 박 센터장은 서대문구의 도움(전세보증금 지원)을 받아 오랜 꿈인 시각장애인 주간보호센터를 홍제동에 열었다. 공간이 생기면서 봉사도 ‘찾아오는 안마’로 바꾸고 매주 화, 목요일 안정적으로 한다. 입소문이 나면서 동네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차츰 늘고 있다. 매주 평균 20명가량이 안마사의 따뜻한 손길로 뭉쳤던 근육을 풀고 간다. 박 센터장은 “안마는 시각장애인들이 직업인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귀한 기술로, 안마기술로 봉사도 하며 자긍심도 느낀다”며 “앞으로도 안마 봉사활동을 이어갈 거다”라고 힘줘 말했다.

강서지회 회원들도 안마 봉사에 나섰다. 강서구는 서울에서 장애인이 가장 많은 자치구다. 시각장애인연합회 회원도 350명에 달한다. 강서구청과 강서구의회의 지원으로 지난 3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각장애인 쉼터가 만들어졌다.

강서지회는 회원들 뜻을 모아 11월29~30일 이틀 동안 쉼터에서 ‘건강나눔안마’ 행사를 열었다. 안마봉사자 12명이 참가했다. 장애인이나 노인 40여 명에게 30분씩 전신 안마를 해줬다. 지적장애인 시설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회복지사들도 안마를 받았다. 하임출 강서지회 회장은 “몸을 펴주는 안마가 큰 도움이 되는 지체장애인들이 이용하기 어려운 게 아쉬웠다”고 했다. 쉼터가 2층에 있고 승강기가 없어 지체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올라올 수 없었단다.

하 회장은 “우리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아 좋았다”며 “행사 뒤 ‘언제 다시 안마 봉사가 있는지’를 묻는 문의가 꽤 있었다”고 했다. 이번에 봉사한 안마사들의 실비 수당(3만원)은 지회에서 지급했다. 그는 “안마사들의 봉사 활동비(실비 수당) 후원이 있으면 쉼터 공간을 활용해 봉사를 좀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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