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도심 산업생태계 지켜내려 기록해요”

청계천·을지로 보존가치 알리는 4명의 청년 활동가

등록 : 2020-03-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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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작가집단 ‘리슨투더시티’ 앞장

청계천기술문화연과 따로 또 같이

도심산업생태계 책·영상 등 남겨

“기록은 궤적 보여주는 중요 도구”

독립작가집단 ‘리슨투더시티’의 박은선 디렉터(오른쪽부터), 청계천기술문화연구실의 최혁규·안근철 연구원, 리슨투더시티의 장현욱씨가 3월5일 중구 입정동 세운 3구역의 작업장을 찾아가고 있다. 이들은 2018년부터 사라질 위기에 처한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 도심 산업생태계의 사람, 기술, 골목길 등을 기록해왔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우리에겐 손이 도구야. 필요한 도구가 있으면 거의 만들어 써.”

3월5일 청년 4명이 수첩, 녹음기, 카메라를 들고, 중구 입정동 세운 3구역 끝자락에 있는 신아주물을 찾았다. 독립작가집단 ‘리슨투더시티’의 디렉터 박은선씨와 장현욱씨, 청계천기술문화연구실의 안근철씨와 최혁규씨는 모두 1980년대생이다. 먼저 작업장에서 쓰는 도구들에 눈길이 간다. 김학률 신아주물 사장이 자신이 직접 만든 도구들을 바닥에 펼쳐놓고 쓰임새를 설명했다. 김 사장의 거친 손과 도구가 한 몸처럼 움직인다. 청년들은 수첩에 적고 사진을 찍으며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세심히 기록한다.

리슨투더시티는 ‘도시에서 밀려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를 내걸고 활동하는 예술창작집단이다. 도시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여러 매체·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을 모토로 삼고 2009년부터 활동해왔다. 청계천기술문화연구실은 2017년 도심제조업 공부 모임으로 시작해 청계천 일대의 기술문화를 조사·연구하고 있다. 네 청년은 지난해부터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 도심 산업생태계의 사람, 기술, 골목길 등을 ‘따로 또 같이’ 기록해왔다.


2년 전 리슨투더시티는 연구자, 디자이너들과 함께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를 만들었다. 산업생태계를 파괴하는 재개발에 문제를 제기하고, 지역의 가치를 기록해 보여주고 퍼뜨리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미술을 전공하고 도시공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박은선씨는 지난해 3월부터 청계천의 산업생태계 조사에 나섰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회원들과 함께 세운 3구역과 수표지역의 321개 업체를 대상으로 방문 설문 조사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네트워크를 분석했다. “청계천에 오면 뭐든 다 만들 수 있다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만들고, 작업장들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계천을 찾는 고객의 20% 이상이 대학·기업·국공립 연구소, 의료기기 개발업체 등이었다. 예술가와 메이커들도 작품이나 시제품을 만들 때 이곳을 찾았다. 청계천의 작업장과 유통 상가들이 수십 년간 협업해 산업생태계를 만들어왔다는 것과 이곳이 거대한 연구소이자 예술작업실 구실을 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 결과는 지난 연말부터 연재물로 인터넷 신문에 실었고, 조만간 학술지 논문으로 낼 예정이다.

청계천기술문화연구실의 안근철씨는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기록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문화활동가이자 미디어문화연구 박사과정에 있는 최혁규씨와 함께 기술자들의 생애와 작업장을 기록해왔다. 최씨는 주로 기술자들을, 안씨는 작업장과 기계와 도구 같은 사물들을 기록한다. 이들은 기술자들의 기술 습득과 숙련, 기술 공정과 협력적 생산방식, 작업장 내부의 기계와 도구의 배치, 이들의 입수 경로와 사용법 등에 초점을 맞췄다. 60여 년에 걸쳐 만들어져온 독특한 일터 문화와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식당, 다방, 골목길 등도 기록했다.

신아주물의 도구를 기록하는 모습

안씨는 을지로 지역 산업생태계 현장 연구원으로 참여해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추적과 산업생태계를 조사한 경험을 이어가고 있다. “필요와 상황 따라 기술자들이 직접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고 한다. 최씨는 “다품종 소량생산에 특화된 청계천의 협력적 생산방식은 4차산업의 메이커들에게 기술적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두 사람은 그간의 기록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올리고, 인터넷 신문 기사로 실었다. 조만간 <입정의 기술-정밀한 사람들>이란 주제로 작은 책자를 낼 예정이다.

네 사람은 지난 2월 <무빙 메시지스-청계천·을지로는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이다>를 함께 펴냈다. 지역의 협력적 생산방식을 직접 접하기 위해 기술자들과 협업해 진행한 현장형 기술교육 시범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기획과 설계, 제작의 과정에서 기술과 협력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금속마차를 만들어 ‘무빙 메시지스’라 이름 붙였다. 마차를 끌고 다니며 제작 과정에 참여한 작은 공장을 둘러보는 ‘청계천·을지로 투어’를 10여 차례 운영했다. 장현욱씨는 “투어 참여자들은 작업과정에 따라 작업장을 찾아 설명을 들으며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들의 기록은 ‘지켜내기 위한 방법’에 방점이 찍혀 있다. 박씨는 “기록은 궤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도구다”라고 한다. 최씨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인 이 도심제조업 공간이 무엇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는지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4일 서울시가 발표한 ‘세운상가 일대 도심 산업 보전 및 활성화 대책’의 방향성에 대해 이들은 환영했다. 하지만 기존 산업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현실적인 이주대책과 산업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리슨투더시티의 박은선씨는 “협의 기구를 구성해 소상공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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