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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로 날짜 잊지 않는 한 봉사할 것”

구로구 자원봉사자 ‘명예의 전당’에 이름 올린 봉사왕 이정희씨

등록 : 2020-08-2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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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16년 동안 봉사해와

“도움 준 사람에게 빚 갚는 게 봉사”

2018년 5천 시간 넘어 ‘구 봉사왕’

호스피스 병동 마사지 봉사 생생

구로구 봉사왕 이정희씨가 7월22일 구로구청 신관 3층에 있는 자원봉사자 명예의 전당 앞에서 웃음 짓고 있다.

“환자들이 미리 분위기를 알죠. 자신들이 곧 죽게 되리라는 걸 압니다.”

구로구 봉사왕 이정희(72)씨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들에게 마사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7월22일 구로구청 안 카페에서 만난 이씨는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갓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이씨는 환자 명단이 적힌 수첩을 들고 병실에 찾아갔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처음에는 환자 이름을 외우려고 애썼는데,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동인지 알고는 많이 슬펐다”며 “당시 상황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일주일 뒤 다시 그 병실을 찾아가면 마사지해줬던 환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차라리 이름을 모르면 덜 생각날 텐데, 이름을 알고 나니 두고두고 생각나 마음이 아프더라”고 했다.

“오죽하면 저승사자라고 할까요.”


곧 생을 마감할 사람들에게 마사지해주니 주위에서 마사지 봉사자들을 ‘저승사자’라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마사지 봉사를 오래 하는 봉사자는 드물다. 하지만 이씨는 자신이 사회에 갚아야 할 ‘빚’이나 ‘의무’를 다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30대 중반의 유방암 환자를 떠올리고는 마음 아파했다. “아기도 있는데, 남편은 병원에 찾아오지도 않아 너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죠. 서너 번 정도 돌본 뒤 그다음에 가니 없더라구요.”

이씨는 2004년 케이티앤지(KT&G) 영양죽 봉사를 시작으로 고척1동주민센터 자원봉사 상담가, 고대 구로병원 호스피스 봉사, 아름다운가게 판매 봉사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씨는 왕성한 봉사활동으로 2013년 모범 자원봉사자로 구청장 표창을 받았고, 2018년에는 구로구 봉사왕으로 선정됐다.

구로구는 2009년부터 매년 12월 자원봉사자의 날을 기념해 누적 봉사시간 5천 시간 이상인 봉사자에게 봉사왕 시상을 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이들 봉사왕들의 봉사 정신을 기리기 위해 구로구청 신관 3층 자원봉사센터 바깥 벽면에 자원봉사자 명예의 전당을 만들었다. 명예의 전당에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 동안 총 40명의 구로구 봉사왕들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붙였다. 이씨도 이곳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씨는 직장을 그만두면 봉사를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어디서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한다. “그렇게 3년을 보내다, 2004년 우연히 가리봉동 근처에서 수지침 강습자 모집 신문 내용을 봤죠. 교육은 공짜지만, 대신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죠.” 이씨는 그렇게 2004년 일주일에 두 번씩 노인들에게 영양죽을 나눠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씨는 이후 2006년부터 고대 구로병원에서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2009년부터 아름다운가게 판매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고대 구로병원에서는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30분부터 1시30분까지 주 3시간, 아름다운가게에서는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주 4시간 봉사활동을 한다. 이씨는 이렇게 매주 7시간씩, 1년 360시간 넘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매주 금요일 아름다운가게에서 진행되는 이씨의 봉사활동은 매장 정리와 판매 봉사 활동이다. 2009년 6월12일 개봉사거리에 아름다운가게 100호점이 문을 열었는데,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라서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회사와 주위 사람들 덕을 많이 봤죠. 봉사하는 게 내가 갚아야 할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 봅니다.”

이씨는 “아이들을 교육하고 결혼까지 시킨 게 나 혼자 한 게 아니라, 주위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렇다고 일일이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고맙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봉사활동을 하는 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씨는 2016년 봉사활동 시간이 4천 시간쯤 됐을 때, 손주들을 위해 봉사왕이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우연히 인터넷에 들어갔는데, 내 봉사활동 시간이 4천 시간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5천 시간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계속했죠.”

이씨는 봉사를 계속하는 주된 이유에 대해 “아이들을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며 “이제 점점 늙어가면서 손주를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고 했다.

“앞으로 나이 들면서 자식·손주들 못 알아볼까봐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자식들한테 해준 게 없는데, 늙어서 폐가 될까봐서죠.” 이씨는 몇 년 전, ‘일과성 전기억상실증’으로 2시간 정도 횡설수설한 적이 있다. ‘일과성 전기억상실증’은 정상인이지만 일시적으로 기억상실이 오는 질환이다. 그는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일어나거나 정도가 심해질까 걱정했다.

“월요일과 금요일을 잊어먹지 않을 때까지만 다니려고 해요.” 이씨는 앞으로도 기억이 온전하고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주위 사람들을 위해 계속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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