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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살’을 렌즈에 담는 현대판 하멜

성북구 사진공모전 최우수상 받은 야거 예츠씨

등록 : 2021-12-0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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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9일 성북구 장위동 흥인전자 만물상 앞에서 야거 예츠씨가 주인 할아버지와 패널로 만든 사진을 들고 웃고 있다. 패널 속 작품은 올해 성북구 사진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국살이 20개월차 30대 네덜란드인

아내 권유로 사진 취미 살려 첫 응모

50년 된 전파상 하루 여는 모습 담아

“오래된 것 보존에 사진이 힘이 되길”

‘성북, 어디까지 알고 있니?’라는 제목의 성북구 사진공모전이 올해도 열렸다. 연령, 국적, 지역에 상관없이 국내 거주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173명이 417점을 응모했다. 1차 내부위원 심사를 거쳐 2차 내외부 심사위원 4명이 합의로 수상작을 뽑았다.

최우수상은 ‘흥안TV 전자 만물상’의 네덜란드 출신 야거 예츠(38)씨에게 돌아갔다. 50여 년 전 성북에 터를 잡고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가게와 주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양복 정장 차림의 80대 주인이 가게 안 물건을 밖으로 꺼내며 장사를 준비하는 사진은 마치 한 편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생각지도 못한 상을 받아 너무 기쁘다.” 11월25일 오전 성북구청에서 만난 예츠씨가 수상 소감을 말했다. 그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만 정식으로 활동한 적이 없고, 공모전 응모도 난생처음이라 상을 받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통역해준 아내 박인영씨는 그가 한국 생활을 즐겁고 신나게 한다고 전했다.


서울살이 20개월째, 예츠씨는 아직 한국 생활에 적응 중이다. 네덜란드에서 결혼한 아내와 한국에 살러 지난해 4월 입국했다. 한국 현지법인에서 일한 적인 있는 그는 지인 소개로 음악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 박씨를 만나 2018년 결혼에 이르렀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의 어학당을 다니기도 했고 사진, 러닝 등 취미생활을 하며 지내왔다. 키가 2미터 넘는 그로서는 어디서든 눈에 잘 띄는 게 유일하게 불편한 점이다. 심할 땐 지나가는 사람마다 ‘키 크다’는 소리를 한단다. “사람들이 너무 빤히 쳐다보곤 해서 때론 약간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사진공모전은 아내 덕분에 알게 됐다. 성북구청을 들렀던 박씨가 공모전 포스터를 보고 그에게 응모를 권했다. 박씨는 “남편이 서울의 낯선 곳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내는 것을 즐겨, 공모전 참여가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 10월23일 이른 아침, 그는 공모전에 낼 사진을 찍으러 사진기를 챙겨 집을 나섰다. 일상에서 하루를 여는 사람들 모습을 찍어보기로 했다. 장소는 지도를 보고 정했다. 성북의 동쪽인 장위동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다. 그곳에서부터 천천히 집 방향인 창신동 쪽으로 걸어 내려오면서 골목골목을 누벼볼 계획이었다.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에서 내려 재래시장 쪽으로 갔다. 시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중 건너편에 전파상 가게가 보였다. 아주 오래된 곳이라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때마침 가게 주인 할아버지가 장사를 위해 라디오, 온열기 등을 밖으로 꺼내놓았다. 가게 앞에는 자전거 한 대가 놓여 있고, 진열장 아래엔 전자·전기 제품들이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었다. 진열장은 칸칸이 나뉘어 있고, 그 속에 갖가지 물건이 가득했다.

그는 바로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의 네모 안에 잡힌 구도와 분위기가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순간부터 셔터 누르기를 2분 동안 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렌즈에 담는 스타일이다. “사진을 찍을 때 보고 느낀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카메라 세팅 뒤엔 본능적으로 찍는다”고 했다.

자신의 사진이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공존에 도움이 되길 그는 바란다. 당선 연락을 받은 뒤 아내와 함께 전파상을 찾아 초상권 등의 양해를 구했다. 할아버지는 흔쾌히 동의해주면서, 50년째 이어온 가게가 재개발을 앞두고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을 얘기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단다. 그는 “오랜 시간 거친 삶의 여정을 견뎌온 할아버지가 이제는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며 “오래된 것이 천천히 사라져 갈 수 있게 제 사진이 힘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케이(K)팝, 케이컬처, 케이문화, 케이드라마 등 케이 복합어가 이어질 정도로 한류 바람이 갈수록 강해지는 가운데, 그는 한국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 모습에 카메라 렌즈를 맞추고 싶어한다. 한국의 속살을 담고 싶은 것이다. “전파상 할아버지처럼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고 싶고, 더 나아가 알리고 싶다”며 “여건이 된다면 블로그, 책, 다큐멘터리 영상 등으로 담아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하멜 표류기>를 읽고 있다. 350여 년 전 하멜의 여정을 따라 한국의 곳곳을 찾아가는 것을 아이디어 수준으로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에게 한국 생활은 즐거운 여행이자 모험이다. 처음 접하는 문화나 생활방식, 낯선 곳 등을 알아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재미있단다. 현대판 하멜을 그는 꿈꾸고 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성북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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