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산책하며 근심 잊는 인문학 공간 되길”

20여년간 망우리공원 역사문화 인물 101명 조명한 김영식 작가

등록 : 2022-10-06 14:59
수필가이자 번역가인 김영식 작가는 20여년 동안 망우리공원에 잠든 근현대 역사문화 인물의 묘, 비석을 찾아 고인이 산 시대와 삶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김 작가가 9월28일 중랑망우공간 앞 행사 펼침막 앞에서 망우리공원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2003년부터 1천여회 찾아 조사하며

숨겨진 근현대사 인물 묘·비석 발굴

2009년 펴낸 인물열전 개정 4판 준비

“유산 소실 위기…보존 논의 서둘러야


중랑구 망우리공원이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축구장 200여 개 규모(약 50만 평)의 울창한 숲에 한적한 산책로, 그리고 근현대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갖췄다. 황량한 묘지였던 과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1933년 시작해 1973년 만장으로 묘지 사용을 중단한 뒤 50년에 걸쳐 일군 변화다. 1990년대 서울시·중랑구의 녹화사업, 연보비(고인의 말과 연혁을 새긴 큰 돌) 설치에 이어 2016년엔 역사 체험과 사색을 위한 인문학길 ‘사잇길’이 조성됐다. 지난 4월엔 편의시설과 교육전시관을 갖춘 중랑망우공간이 개관했다.

망우리공원에 잠든 역사문화 인물을 조명해온 수필가이자 번역가인 김영식(60) 작가는 이 변화 과정에 함께했다. 그가 2009년 펴낸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는 망우리공원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첫 책이다. 초판엔 40명의 이야기를 담았고 내년 상반기 펴낼 개정 4판에는 70여 명의 이야기를 담을 계획이다. 9월28일 중랑망우공간에서 김영식 작가를 만났다.

김 작가는 “망우리공원에 대략 100여 명의 역사문화 인물이 영면해 있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가 7명의 조사팀을 꾸려 현재 남아 있는 6900여 기를 대상으로 전수 조사 한 일을 전하며 그는 “유명인사 기준은 사람에 따르지만 ‘망우리의 역사문화 인물 101명’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101명은 매우 많다는 뜻 또는 꽉 찬 100의 기반에서 미래로 첫걸음을 내딛는 뜻을 지닌다”며 “감동적인 비문을 남긴 일반인도 여럿 있으니 숫자는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망우리공원과 김 작가의 인연은 4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에 그는 처음으로 집 근처 망우리공원을 둘러보다 근현대 역사적 인물(한용운, 방정환, 조봉암 등)들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0대에 요절한 아들을 기린 비석도 눈에 띄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가도 너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 비석에 담긴 부모의 애끓는 마음이 애처롭게 다가왔다. 이날 그는 일기에 ‘망우리에 대한 르포 하자’라고 적었다.

수필가로 등단한 뒤 2003년 망우리공원을 다시 찾았다. 박인환 시인과 동료 선배 문인들의 묘를 보기 위해서였다. 민둥산에 무덤만 가득했던 곳이 숲이 우거진 공원으로 변해 있었다. 이름을 알 만한 사람들의 비석이 많이 보였다. 주말마다 숲속을 돌아다니며 비문을 통해 고인이 산 시대와 삶을 읽어 글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김 작가는 “공원관리사무소에서 복사해 온 지도를 갖고 길도 없는 숲속에서 헤매다 넘어지거나 쓰러지기도 하고, 고라니와 마주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인물 열전 초판이 크게 주목받은 것과 함께 망우리공원에도 가시적인 변화가 있었다. 201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꼭 지키고 싶은 우리의 문화유산’, 2013년 서울시의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문화재청은 2017년 독립지사 묘역 8기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2012년 한용운 포함 현재 총 9기) 2020년엔 중랑구가 서울시로부터 관리권을 이관받아 지난해 전담과인 ‘망우리공원과’를 신설했다.

그는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며 “인문학적 이해도가 높은 류경기 중랑구청장이 추진력 있게 잘하고 있어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망우리공원 묘지 운영이 2038년 완전히 폐지되면 묘지는 모두 옮겨야 한다. 그는 지난해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문화자산(묘, 비석) 소실 우려에 대한 목소리를 내왔다. 문화재로 등록된 보존묘지 9기를 빼고는 개인이 관리해야 하기에, 이장을 고려하는 후손이 적잖다. 그는 “독립지사와 문화예술인, 서민 등이 한데 모여 있어 ‘거대한 근대사박물관’으로 보존해 갔으면 하는데, (문화유산이 계속 빠져나가면) 다양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실제 지난해 문화유산이 소리 없이 사라진 상황을 겪었다. 한국전쟁 흥남철수 작전 때 공을 세운 현봉학 박사의 동생인 현요한의 비석이 없어져 어렵게 유족에게 연락해 땅에 묻었던 비석을 파내 제자리에 세워놓았다. 이 일을 겪고 그는 다급한 심정에 서울시에 민원을 넣어 ‘서민 묘 개장과 이장 신청이 있으면 전문가 자문 등 검토해 결정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하지만 실행 시기와 공원 실무 담당자에게 지침이 내려왔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는 소극적 행정에 답답함을 토로하며 “특히 내년엔 윤달이 있고 내후년은 윤년이라 이장이 많아질 거라 빨리 대책을 세웠으면 한다”고 힘줘 말했다.

망우리 인물 조명은 그에게 필생의 업(라이프워크)이 됐다. 그는 현재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 자문위원회 총괄기획가이면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회사를 운영하며 틈틈이 망우리 관련 책을 쓰고 있다. 올해 연말쯤 아이들을 위한 안내서 <망우역사문화공원 천천히 읽기>(가제)를 출간할 예정이다. 지난해 1월부터 <중랑신문>에 월 2회 연재하고 있는 ‘망우리 이야기’도 책으로 묶어 낼 계획이다. ‘망우인문학자’를 자처하는 그는 “대도시에서 산책하며 근심을 잊는 인문학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망우인문학을 정립하는 걸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