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임금’ 떠난 교토, 수력 발전소 물길이 ‘근대’ 만들어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① 교토 부흥의 ‘기적’ 비와코소스이

등록 : 2022-10-13 15:41 수정 : 2022-10-20 10:48
비와코소스이기념관에서 바라본 게아게선류장과 수로. 가모가와강으로 이어지는 수로는 봄가을 아름다운 나들이길이 된다.

메이지유신 뒤 ‘천년도시’ 몰락 조짐 보여

10년 만에 인구 크게 줄어…전통산업 위기

비파호 물길 이용 계획으로 다시 ‘부활’

‘공학의 길’ 앞서야 생활도 철학도 지속


격주로 새 연재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를 시작한다. 일본 교토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맺어와 한국인에게는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현재 일본에 사는 필자의 안내를 따라 천년의 시간 속을 거닐어본다. 서울의 관광 정책과 비교하며 필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보자. 때마침 지난 11일부터 자유여행 목적의 무비자 일본 입국이 다시 허용됐다. 2년 만이다. 편집자   

교토시 히가시야마(東山) 기슭의 고찰 난젠지(南禪寺). 가을이면 만산홍엽이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가부키 연극에서 주인공이 외친 “절경이로세”라는 감탄사로 인해 전국에서 단풍 구경을 오는 곳이다. 그 난젠지 앞에도 교토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가 있다. 난젠지 진입로 한편에 선류(船溜: 배를 띄우는 물길)와 수로가 보이고 반대쪽은 선류와 연결된 폐철길이다. 표고 차 30m, 길이 582m의 긴 오르막을 벚나무들이 뒤덮고 있어 젊은이들 사이에 ‘사진발’ 좋기로 이름나 있다. 기모노로 한껏 멋을 내고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 사이로 인클라인(화물차를 끌어올리고 내리기 위해 만든 경사철도)을 걸어 오르면, 꼭대기 부근에 수력발전(옛 게아게발전소)과 정수시설 등이 보이고, 큰 벚나무 아래 한 젊은 청년의 동상이 서 있다. 오늘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비와코에서 온 물이 선류장에 도착하는 ‘낙백년지몽’ 터널.

 지금까지 등장한 시설에 터널 등을 합친 인공시설을 이곳 사람들은 ‘비와코소스이’(琵琶湖疏水)라고 부른다. 비와코(비파호)는 교토 동북쪽에 있는 일본 최대의 담수호, ‘소스이’(소수)는 관개나 수력발전을 위해 만든 산업용 인공수로를 가리킨다. 즉 물류유통과 식수 공급은 물론 수력발전 등에 이용하기 위해 비와코 호숫물을 끌어와 만든 수자원시설이다. 지금으로부터 137년 전인 1885년 착공해 1890년 완공된 비와코소스이는 이후 교토 부흥의 결정적인 전기가 됐다.

일본 근세인 에도시대(1603~1868)부터 교토 사람들은 교토와 비와코 사이에 동해~교토~오사카를 잇는 물길을 만들고 싶어 했고, 실제 공사계획까지 세운 거상도 있었다. 그러나 산을 지나야 하는 당시 기술상의 어려움과 막대한 비용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 ‘비와코소스이 건설계획’이었다. 이 미증유의 계획을 입안하고 총지휘한 사람은 당시 교토부지사 기타가키 구니미치(1836~1916), 공사감독은 토목기사 다나베 사쿠로(1861~1944)였다. 바로 동상의 주인공이다.

난젠지 안의 비와코소스이 수로각. 지금도 물이 힘차게 흐른다.

다나베가 공사감독에 임명됐을 때 그의 나이 불과 만 23살이었다. 공대(현 도쿄대 공학부의 전신인 공부대) 졸업논문으로 ‘비와코소스이 건설계획’을 제출했는데, 이 논문을 본 기타가키가 그를 교토로 “모셔와” 교토부 전체 예산의 2.5배, 연인원 400만 명이 투입된 일본 최대의 토목공사를 맡겼다.

다나베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긴 2.4㎞의 터널을 뚫을 때 난공사 구간 양쪽에 최장 47m의 수직갱도를 파고 들어가 터널을 연결하는가 하면, 미국에서 수력발전 성공 소식이 들려오자 곧바로 미국에 건너가 이를 확인한 뒤 자신이 계획한 수차발전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미국의 수력발전방식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가 건설한 ‘게아게발전소’는 미국보다 발전 능력이 4배가 큰 것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보기 드문 경사철도 인클라인은 적당한 경사도 때문에 젊은이들의 ‘포토존’으로 사랑받고 있다.

다나베 동상에서 정수장을 끼고 난젠지 경내로 이어지는 수로가 있다. 물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노라면 붉은 벽돌의 거대한 아치형 수로각이 눈에 들어온다. 옛 로마시대 수로를 연상시키는 이 수로각은 지금도 여전히 물을 운반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사찰 풍경을 해치는 이질적인 서양 건축물이었겠으나,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사찰 경관에 녹아들면서 지금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근대유산이 되어 있다. 이 수로각도 많은 사람이 기념사진을 찍고 가는 곳이다.

난젠지 삼문(三門)을 지나 사찰을 나오면 선류장 위에 ‘비와코소스이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아래 수로터널 입구에 ‘낙백년지몽’(樂百年之夢)이란 글귀가 보인다. 기타가키 지사가 소수 건설계획에 반대하거나 비관적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쓴 글씨와 편지 등에 찍은 낙관문이라고 한다. 후세를 위해 백년대계의 꿈을 함께 꾸자는 그의 호소가 지금도 물소리가 되어 흐르는 듯하다.

비와코소스이가 건설되기 전 교토는 쇠락 일로에 있었다. 1867년 메이지유신 이태 뒤인 1869년 일왕이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가자, 교토는 10여 년 만에 인구가 3분의 1이 줄었다. 방직, 염색, 도자기 등 교토의 경제를 지탱하던 전통산업과 상점들이 소비처를 잃고 위기로 내몰렸다. “여우와 이리가 우글대는 곳이 되려는가”라는 한탄의 소리가 높았다.

다나베 사쿠로의 동상.

이때 기타가키 등 소수의 선각자는 교토의 부흥은 오직 산업화와 도시의 근대화에 있다고 보았고, 그 동력을 비호코소스이 건설에서 찾았다. 이처럼 교토의 근대 역사는 왕의 천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재생 노력에서 시작됐다. 이후 2차 소수 건설까지 총연장 35㎞로 완성된 비와코소스이는 천년고도 교토를 근대적인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일왕이 옮겨간 도쿄보다 먼저 도시 전차를 선보였다. 도시는 다시 인구가 늘기 시작했고, 떠나간 상점이 돌아오고 새로운 산업시설이 들어왔다. 오늘날 교세라, 닌텐도를 비롯한 교토의 첨단산업도 멀리는 비와코소스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적의 빛’ ‘생명의 물’ 등 기념관의 찬사는 후손들이 비와코소스이 건설자들에게 바친 헌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교토를 천년고도,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도시라고 쉽게 말한다. 세계유산이 17개나 되니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도시는 역사유적이기 이전에 당대의 생활지이다. 그 어떤 박물관 같은 도시도 사람이 살기 힘들면 실패한 도시다. ‘가미가타’(임금이 있는 곳)를 자부했어도 경제적 활력을 잃자 사람들은 미련 없이 떠났고, 임금이 없어도 살림살이가 좋아지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든 이치다. 천년고도는 그렇게 재생과 부흥의 길로 들어섰다. 오늘날의 ‘세계적인 역사문화 도시 교토’는 미명 위의 공중누각이 아니다.

야마시나소스이 길. 3.3㎞의 걷기 코스.

난젠지 삼문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긴가쿠지(은각사)로 이어지는 소로로 갈 수 있다. 철학자들이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고 하여 ‘철학의 길’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은 길이다. 이 소로는 비와코소스이 지류를 따라 조성됐다. 가을이 깊어 단풍이 짙을 때, 철학의 길에서 시작하여 비와코소스이 길을 걸어보려 한다. 다나베 동상을 전후로 수로각에서 인클라인까지, 체력이 허락한다면 수로를 따라 교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가모가와강 근처에 있는 기타가키 동상까지…. 철학의 길을 낳은 이 길을 나는 ‘공학의 길’이라 불러주고 싶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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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전철 게아게역에서 내려 네지리만보(붉은벽돌통문)를 통과하면 난젠지 경내이다. 삼문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가면 수로각이 나온다. 수로각에서부터 삼문 쪽으로 역순으로 걸어도 된다. 비와코소스이기념관에 들러 짧은 기록영화를 보고 가길 권한다. 유람선도 있는데 예약해야 한다. 시간이 있다면 야마시나역에서 출발해 비사문당(불교 사천왕의 하나인 비사문천을 모신 곳)의 단풍을 구경하고 수로를 따라 조성된 야마시나소스이 길(총 3.3㎞)을 걷는 것도 좋다. 단풍철, 벚꽃철의 멋진 걷기, 달리기 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