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그림 그만두고 카메라 쥔 ‘사진관집 딸’
아버지 이어 사진관 운영하는 관악구 신사동 상미스튜디오 대표 정슬기씨
등록 : 2022-10-27 14:44
정슬기씨는 아버지를 이어 관악구 신사동 ‘노포 사진관’ 상미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정씨가 19일 사진관에서 아버지가 사용하던 마미야 카메라를 앞에 두고 웃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사진은 순간을 간직한, 추억을 담은 기억 저장소죠.” 정슬기(36)씨는 아버지를 이어 관악구 신사동 ‘노포 사진관’ 상미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정씨 아버지가 1976년께 다른 곳에서 옮겨와 이곳에 터를 잡았으니 올해로 얼추 46년째다. 정씨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던 놀이터이기도 했던 사진관에서 이제 대를 이어 사람들의 추억을 만들고 있다. 정씨는 19일 “사진관을 하겠다고 하자 사양 산업이라며 주위에서 반대가 많았다”며 “하지만 아버지만은 사진관을 이어받는 걸 말리지 않았다”고 했다. “네가 하고 싶은 것 하라며 많이 지지해줬어요. 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하지 말라고 하셨죠.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정씨는 “‘너 이것 해’라고 했다면 오히려 하기 싫었을 텐데 아버지가 내 선택을 존중해줘서 맘 편하게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씨는 2012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상미스튜디오를 운영했다.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았어요. 대학 졸업 전시를 하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생각을 굳혔죠.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죠.” 정씨는 아버지와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사진 관련 물품을 사러 남대문시장에 갈 때는 아빠랑 데이트하는 느낌도 들고 촬영을 갈 때도 따라다니다보니 그동안 아빠한테 서운했던 마음이 사라졌어요. 그런 시간이 고맙죠.” 점점 아버지 건강이 나빠져 정씨 혼자 운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제가 출장 갈 때만 아버지가 사진관을 봐주시다가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는 혼자 했죠.” 정씨는 2017년 3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온전히 혼자 힘으로 사진관을 운영해오고 있다. 세월이 변한 만큼 상미스튜디오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2000년대부터 컴퓨터와 디지털카메라, 2010년대 스마트폰이 자리잡으면서 사진관 운영이 어려워졌다. “2004년부터 디지털이 들어왔어요. 휴대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 기울었죠. ‘사진을 뽑는다(현상한다)’는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정씨는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대학 방송국 활동도 하던 정씨는 방송 촬영과 편집을 하면서 디지털기기와 친숙해졌다. “나이를 먹으면 컴퓨터나 디지털기기를 다루는 게 어렵잖아요. 아버지도 사진관을 안 하려고 하셨는데, 제가 대학 다닐 때 아버지를 많이 도와드렸죠.” 정씨는 옛날 생각 하며 동네를 찾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했다. “미국에 이민 갔다가 자신이 살던 동네를 보러 온 사람이 우연히 사진관 앞에 전시된 자기 돌사진을 보고 들어왔어요.” 정씨는 “동네를 추억하러 오는 사람들 얘기를 듣다보면 자신이 몰랐던 부모님과 사진관에 얽힌 얘기도 들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사진관을 찾아 아버지를 추억하는 분들에게서 ‘사람이 좋았다’는 얘기를 제일 많이 들어요. 아버지는 손님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줬죠. 그렇게 또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정씨 자신은 친절하고 사람 좋은 역할을 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마냥 퍼주기만 하면 안 되니 엄마가 사진관을 함께 운영하면서 안 되는 건 안 된다며 악역을 맡았죠. 저는 혼자서 좋은 사람과 악역을 다 해야 하죠.” 정씨는 “나 때문에 아버지가 욕먹으면 안 되니 ‘사람 좋은’ 노력은 한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상미사진관도 상황이 좋지 않다. 결혼, 잔치, 세미나 등 다양한 외부 행사 촬영은 거의 못하고 스튜디오 촬영만 한다. 요즘은 여권 등 서류에 필요한 사진을 주로 찍는다. “영정 사진을 만들려고 오거나 옛날 사진을 가지고 와서 확대하는 손님도 많아요.” 정씨는 “사진관을 접을 정도로 어렵지는 않다”고 했다. 대체로 옛날 사진관 모습을 간직한 상미스튜디오는 종종 드라마나 독립영화 촬영 장소로 쓰인다. 2017년 방영한 엠비시(MBC) 드라마 <20세기 소년 소녀>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옛날 사진관 모습을 담고 싶을 때 자주 찾아요.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옛 사진관 모습을 담고 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촬영 제의가 오면 모두 거절한다. 정씨는 “독립영화 같은 소규모 촬영은 괜찮지만 대형 탑차들이 오는 큰 규모 촬영은 손님과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더 는 안 한다”고 했다. “다시 사진을 뽑는 시대가 돌아오는 것 같아요.” 정씨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중요한 사진을 현상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죠. 수많은 추억이 담긴 사진도 함께 사라지죠.” 정씨는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필름을 찾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피곤할 때도 손님 앞에서 조금 더 웃고 얘기를 많이 하려고 해요. 변했다는 소리 듣기 싫거든요.” 정씨는 “매일 같은 손님이 오는 게 아니라서 그 한 모습만 기억한다”며 “아버지에 이어 친절하게 더 잘한다고 인식되길 바란다”고 했다. “제가 언제까지 여기서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정씨는 사진관이 있는 건물 나이도 있어 마냥 여기서 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렇다고 갑작스럽게 그만두지는 않을 거예요. 서서히 이별의 시간을 준비해야겠죠.” 정씨는 “여기를 떠나더라도 역세권에서 현대식 스튜디오를 하고 싶지는 않다”며 ”작은 골목에서 추억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