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 문학기행
성북동 작은 시비에서 ‘회복’을 얻다
조지훈 시인의 흔적
등록 : 2016-09-30 12:17
조형물에 놓인 의자는 생각의 공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격자무늬 문이 열린 방향이 조지훈이 살던 집이 있던 쪽이다. 문 옆에는 그의 시 <낙화>가 적혀 있다. ‘시인의 방-방우산장’을 뒤로하고 걷는 길에 ‘소문난국수집’을 지나 부동산타운을 끼고 2시 방향 도로로 가다 보면 길 왼쪽에 조지훈 시인이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건축조형물에서 약 150m 정도 거리다. 조지훈 시인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호은종택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에 있는 다른 집(이 집도 방우산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에서 1936년까지 살았다. 조지훈은 아홉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 쓰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에는 구하기 어려운 ‘피터 팬’ ‘파랑새’ ‘행복한 왕자’ 등 서양 동화를 읽으면서 자랐다. 오후의 햇살이 그윽한 주실마을에서 조지훈은 문학의 꿈을 키우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1936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다. 시인의 길, 그리고 <청록집> 열아홉 살이 되던 해인 1939년, 그는 시인이 된다. 고려대학의 계간지 <고대문화>에 실린 조지훈의 글에 따르면 당시에 <문장>지 추천시 모집에 ‘고풍의상’으로 응모했다. 강의 시간에 낙서 삼아 쓴 것을 그대로 우체통에 넣었는데 뽑혔다. 당시 <문장>지는 3회 추천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다음에 낼 시를 써야 했다. 그래서 그해 11월에 완성한 시가 ‘승무’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0년에 ‘봉황수’를 써서 3회 추천을 받게 된 것이다. 추천사를 정지용이 썼다. <문장>지를 통해 문단에 오를 무렵 조지훈이 살던 집이 성북동 집이다. 그가 살던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그 건물 앞에 작은 표지석을 세워 조지훈이 살았던 곳을 안내하고 있다. 표지석에는 조지훈이 살았던 집터를 알리는 짧은 글과 조지훈 소개글, 그리고 그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시이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 ‘승무’가 적혀 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사이에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 중에 박목월과 박두진도 있었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세 사람이 어느 날 성북동에 있는 조지훈의 집에 모였다. 을유문화사에서 세 사람 시를 모아 합동 시집을 내기로 했고, 세 사람은 조지훈의 집에 모여 시집에 실릴 원고를 골랐다. ‘청록집’이라는 제목은 박목월이 붙였다. 그날 밤 성북동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크레파스로 쓴 제목 ‘풀잎단장’ <청록집>은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 <청록집>을 낸 지 6년 만인 1952년 조지훈은 첫 개인 시집을 피난지인 대구에서 낸다. <풀잎단장>이라는 제호는 당시 7살이었던 조지훈의 큰아들이 크레파스로 쓴 것이다. 그리고 4년 뒤인 1956년 조지훈은 <조지훈 시선>을 낸다. 등단 이후 1956년까지 쓴 작품 가운데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 등단 추천작 3편과 경주에 있는 박목월을 찾아가서 쓴 ‘완화삼’ ‘파초우’ ‘낙화’ ‘풀잎단장’ 등이 대표작이다. 조지훈의 ‘완화삼’에 박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로 화답했다. 조지훈이 경주에 있는 박목월을 찾아갈 당시에 조지훈은 건강을 막 회복했을 때였다. 조지훈은 22살 되던 해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간다. <고대문화>에 실린 그의 글 ‘나의 역정’에 따르면 ‘자기 침잠의 공부에 들었던 시기’였다. 일제의 식민정책은 날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졌다. <문장>지가 폐간되었고,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월정사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술을 마시고 목 놓아 울다가 졸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병을 얻은 그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건강을 회복한 조지훈이 찾아간 곳이 경주 박목월의 집이었다. 성북동 골목 한쪽에 있는 작은 비석 앞에서 시인 조지훈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회복은 아픈 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어떤 시인의 글이 떠올랐다. 아픈 시대의 어느 날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글 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