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신라에서 온 도래인들, 교토분지를 옥토로 바꾸다

④ 고대 교토의 개척자 ‘하타씨’의 본거지 우즈마사와 대언천 일대

등록 : 2022-11-24 15:45
하타씨가 건설한 고대 치수시설의 흔적을 간직한 아라시야마의 대언천. 지금은 유명한 유원지다.

5세기 신라에서 건너온 하타씨족

농업·양잠 등 식산활동, 대호족 성장

일본 곳곳 지명과 씨명의 ‘뿌리’가 돼

고류지가 있는 우즈마사는 ‘종갓집’격


아라시야마의 아름다운 강 ‘대언천’

하타씨가 쌓은 제방에서 이름 유래


8세기 말 교토 건설도 하타씨 힘 커

‘우즈마사’가 “울지 마소”라는 비애도

교토시 서북쪽 가쓰라가와 강 상류에 아라시야마 산이 있다. 뱃놀이하는 강과 부드러운 능선의 산이 잘 어우러진 절경 속에 텐류지(세계문화유산) 등 유명한 절과 신사가 밀집해 있다. 볼 것 많은 교토에서도 손꼽히는 유원지다.

도게쓰(渡月)다리는 마치 달을 건너는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곳으로 이름다운 선남선녀의 낭만적인 데이트코스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강을 그냥 ‘오오이가와’(대언천)라고 부른다. 옛날 어느 시기에 있었던 ‘대언’(大堰, 큰 둑)이 지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토질은 비옥하나 해마다 반복되는 강의 범람 때문에 농사지을 수 없던 칡덩쿨밭이 옥토가 된 것은 보를 만들어 거친 물살을 제압하고 둑을 쌓아 안정된 물길을 낸 ‘대언천’ 덕분이었다. 학자들은 그 치수사업을 5세기 후반의 일로 본다.

대언천을 건설한 주체는 5세기 무렵 신라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온 도래인 집단 ‘하타’(또는 하다. 한자로는 秦(진)을 쓴다)씨 일족이다. ‘하타’ 또는 ‘하다’라는 씨족명은 한국어 ‘바다’(海)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는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파단국’(波旦國)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하타씨의 씨사였던 마쓰오타이샤 신사의 ‘제녀’.

처음에 교토 남쪽 지역에 흩어져 살던 하타씨는 대언천 개발로 일군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7세기 초에는 대호족으로 성장했다. 아라시야마 일대는 물론 강 건너 동쪽의 사가노와 우즈마사(太秦), 교토 남쪽 후시미의 후카쿠사 등에서 대촌락을 이루었고, 마침내 ‘교토 토박이’가 됐다. 그들의 뿌리는 지금도 일본 곳곳의 여러 지명과 씨명(氏名) 속에 무수히 남아 있다.

아라시야마의 아름다운 풍광을 뒤로하고 대언천 강변공원 산책길을 따라 하류 쪽으로 2㎞쯤 걸으면 마쓰오타이샤라는 신사가 나온다. 마쓰오신사는 ‘술의 신’을 모신 신사로 전국적 명성이 있는데, 원래는 하타씨의 조상신 신사였다. 토지개척사업의 성공으로 대거 대언천 유역으로 이주한 하타씨가 산속에 있던 선주민의 신사를 평야지대로 ‘하산’시켜 세웠다. 수렵채집의 신과 농경신의 공존은 이렇게 시작됐다. 일본 상인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교토 동남쪽 후시미이나리신사도 비슷한 방식으로 하타씨들이 세운 신사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양잠의 신을 모신 가이코노야시로 신사의 신비한 ‘삼족도리이'.

하타씨와 그 부속민들은 베짜기와 양잠에 능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재무, 회계 지식을 가지고 활발하게 재산을 늘려갔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정치에도 참여하게 된다. 8세기 후반의 교토(헤이안쿄) 건설은 당시 일왕인 간무덴노의 정치력과 하타씨족의 경제력이 결합한 대사업이었다. 헤이안시대 초기에는 수도 주민은 물론 도시의 실무 관리들도 대개는 하타씨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신도시 주택의 건축과 거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부동산의 귀재’도 하타씨였다.

대호족으로 성장한 하타씨는 대언천 건너 동쪽 지역도 세력권에 넣었다. 마쓰오신사에서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우즈마사가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하타씨의 ‘종갓집’ 동네이다.

우즈마사와 인근 사가노 일대에는 하타씨족의 것으로 인정된 고분이 즐비하다. 그중 특히 우즈마사 주택가에 돌무지로 남아 있는 헤비즈카고분이 유명하다. 전장 70여m로 일본에서 네 번째 큰 이 전방후원분 유적은 7세기초 일본의 통치자 쇼토쿠 태자(?~622)의 정치 파트너 진하승(秦河勝·하타노카와카쓰)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의 나라비가오카 고분도 하타씨족 최고수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교토 서북부의 아름다운 절 닌나지(仁和寺·세계문화유산)를 구경한 뒤 시간이 남는다면 산문 앞쪽에 있는 이 나지막한 봉우리에도 한번 올라보길 권한다. 우즈마사에서 후시미까지 교토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제1봉에서 바라보는 닌나지의 풍경은 그림 같다.

太秦(태진)이라 쓰고 우즈마사라고 읽는 우즈마사역 간판.

장난감 같은 노면 전차가 다니고 영화마을이 있어 젊은 관광객들도 찾아오는 우즈마사 일대는 하타씨족의 ‘큰집’에 해당하는 곳인 만큼 하타씨 관련 유적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류지(広隆寺) 절이 있고, 근처에 양잠의 신을 모신 가이코노야시로 신사가 있다. 비단짜는 기술을 보유했던 하타씨들이 세운 것으로 여겨지는 이 신사에는 다리가 셋인 진기한 도리이(鳥居·신사 앞에 세우는 문)가 있다. 일본 유일의 형태로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근원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신라 도래인 하타씨의 신사인 만큼 한국 학자들도 연구에 참여하면 뭔가 ‘비밀’을 푸는 열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진하승 부부의 목상.

고류지는 너무나 잘 알려져서 설명이 더 필요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 국보(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아 신라 제작설이 있는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이 절에 안치돼 있다. 독일 역사가 카를 야스퍼스가 ‘영원한 미소’라며 감탄했다는데,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나루호도!”(과연)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걸작이다. 고류지는 하타노카와카쓰, 즉 진하승이 세운 절이다. 일본 역사기록에는 쇼토쿠 태자가 진하승에게 불상(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내리자, 진하승이 이 절을 짓고 불상을 안치했다는 것이다. 신라가 일본 조정에 선물한(아마도 진하승이 먼저 정치적 목적으로 요청했을 것이다) 미륵불상을 매개로 쇼토쿠태자와 하타씨족이 서로의 결속을 대내외에 과시한 정치적 이벤트였다고 생각된다. 고류지는 하타씨족이 쇠락한 뒤에는 하타씨의 신사라는 사실은 잊히고 쇼토쿠 태자 신앙의 중심 사찰로 일본 민중에게 각인됐다. 일본인에게 쇼토쿠 태자는 아주 인기 높은 ‘신’이어서, 교토 중심부에서 고류지로 오는 길 이름까지 ‘다이시미치’(태자길)가 되어 있다.

하타씨족의 세력을 보여주는 거대한 헤비즈카고분 유적.

그러나 역사의 뿌리는 영영 감춰지지는 않는 법인지, 고류지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가상하게도 진하승 부부 목상을 만들어 미륵보살반가사유상 곁에 세워뒀다. 미륵보살의 미소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진하승의 목상을 바라보노라니 천오백 년도 더 전의 어느날 한반도 동부의 어느 포구에서 출발한 뒤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의 어느 해안에 도착한 용감무쌍한 하타씨들의 설렘 가득한 얼굴이 겹쳐진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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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우즈마사’는 5세기 후반 이후 성립한 하타씨의 씨 족명으로 한자로는 太秦(태진)이라고 쓴다. 하타(秦)씨의 ‘큰집’, 또는 ‘종가’라는 의미이다. 신라계 도래인 정착지였던 우즈마사와 아라시야마, 사가노 일대는 지금도 교토에서 ‘자이니치’(在日·재일)가 많이 사는 동네로 손꼽힌다. 총련계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이다. 초기 이민자들을 비롯해 간토대지진 때 박해를 피해 온 재일조선인, 태평양 전쟁 때 징용 온 군수공장 노동자 등등이 이곳에 자리잡은 것이다. 일부 재일동포는 우즈마사가 “울지 마소”란 뜻이라 믿고 있다. 비애가 낳은 억측이지만, 어떤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