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에 ‘전동휠체어 통행길’ 구분하니 위험 상황 3분의 1로 줄어
여명길 등 실험 전후 확연한 차이 보여
‘쓰레기장’ 된 구역도 클린존으로 거듭나
강남구, “부족한 부분 보완해 확대 검토”
“좁은데다 환풍기도 있어 사람들이 뒷골목쯤으로 생각해서 담배를 많이 피웠죠. 건물 안으로 담배 연기가 들어가 민원이 많았어요.” 강윤경 강남구 뉴디자인과 공공디자인팀 주무관은 11월23일 “사람들이 이곳을 흡연 공간으로 인식하고 담배를 피웠다”며 “환경미화원이 청소하고 돌아서면 다시 담배꽁초가 쌓여 힘들어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강남역 11번 출구 앞 글라스타워와 와이비엠(YBM) 강남센터 건물 사이에는 길이 45m, 폭 3m가량 되는 좁고 기다란 공공보행 통행로가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이 통행로가 담배 연기 자욱한 ‘토끼굴’로 변했다. 길바닥은 담배꽁초와 흡연자가 뱉은 가래 등으로 지저분했다. 강남역 11번 출구로 나와 핵심 상권인 뒤쪽 여명길(테헤란로1길)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하는 게 가장 빨라 통행자도 많다.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간접흡연에 시달려야 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밤에는 더욱 심각했다.
강남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길을 쾌적한 보행 공간이면서 강남역 근처 약속 장소로 삼을 만한 ‘만남의 숲길’로 탈바꿈시키는 실험을 했다. “공공디자인을 적용해 인식과 행동 변화를 유도하기로 아이디어를 냈죠.”
강남구는 이 길의 바닥에 초록색 카펫을 깔고 공기를 정화할 수 있는 식물을 배치했다. 그 결과 흡연자가 많이 줄어든 것을 확인했다. 강 주무관은 “1차 실험 결과, 이전보다 흡연자가 34%가량 줄었고 보행로 폭을 더 줄였더니 흡연자는 1차 때보다 16%나 더 줄었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러 왔다가도 피울지 말지 머뭇거리는 사람도 많아요.” 이날 담배를 피우러 온 임아무개(45)씨는 “담배꽁초가 떨어져도 지저분해 보이지 않고 이전보다 훨씬 깨끗해져서 좋다”고 했다. 하지만 “근처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이곳뿐”이라며 “흡연 공간을 따로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강남구는 실험을 위해 만든 임시 시설을 11월 말에 철거했다. 하지만 강 주무관은 “내년에 영구시설로 만들지 검토할 계획”이라고 했다.
강남구는 지난 10월부터 11월까지 시민불편 해소를 위한 다양한 공공디자인 실험을 했다. ‘토끼굴’이었던 공공보행통로를 쾌적한 ‘만남의 숲’으로 바꾸고 음료수거통을 만들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던 음료가 든 컵을 줄였다. 또한 쓰레기가 쌓이고 흡연과 불법주차로 골머리를 앓던 곳을 쾌적한 ‘클린존’으로 만들었다. 강 주무관은 “현대 사회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공공디자인을 활용하면 사소한 듯 보이지만 큰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역 일대는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커피 등 음료를 들고 걸어가는 사람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음료를 다 마시지 않은 컵을 쓰레기통에 버려 문제가 심각했다. “재활용 쓰레기통 안을 보면 음료가 든 컵이 많아요.” 강 주무관은 “이렇게 버린 음료컵은 여름철에는 벌레도 생기고 악취도 심해 오가는 시민들 기분을 언짢게 할 뿐만 아니라 분리수거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음료수거함을 설치하면 음료가 든 컵을 쓰레기통이나 재활용통에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없으니까 사용을 안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한번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강남구는 강남대로 보행로 2곳에 일반 쓰레기통, 재활용 쓰레기통과 함께 10ℓ들이 음료수거함 ‘모아통’을 함께 설치했다. 먹다 남은 음료는 모아통에 버리고 플라스틱 컵이나 빨대는 바로 옆에 있는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도록 했다. 악취 저감 업체와 협력해 쓰레기통 안에 벌레가 꼬이지 않고 악취를 줄이는 장치도 마련했다.
개포동 에스에이치(SH)대치1단지 아파트 주민들이 보행약자, 시각약자, 전동휠체어 이용자를 구분한 3개의 대기줄에 맞춰 줄을 서 있는 모습.
“모아통을 설치하고 이틀에 한 번씩 비워요. 이용률이 굉장히 높다는 걸 알았죠. 쓰레기통 옆에 있다보니 분리수거도 잘되더라고요. 필요성을 확인했습니다.” 강 주무관은 “서울 거리에 음료수거함이 있는 곳은 강남구뿐”이라며 “문제점을 보완해 내년 봄부터 여름까지 다시 실험을 거쳐 확산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명길에 있는 강남이(e)스퀘어 건물 앞에는 음식물 쓰레기통 9개가 줄지어 있었다.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공간으로 여겨서인지 음식물 쓰레기통 주변이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건물 부지와 보행로를 구분 짓는 낮은 담벼락 위에는 음료컵도 수북이 쌓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아 늘 담배꽁초가 바닥에 떨어져 지저분했다. 좁은 이면도로지만 차량 통행도 많아 소음과 불법주차도 심했다.
강남구는 이곳에 있던 음식물 쓰레기통을 치우고 깨끗한 장소로 인식할 수 있도록 ‘클린존’으로 지정했다. ‘세상에서 제일 공기 맑은 곳’이라는 공기청정실 ‘큐브’를 만들고 평면이던 담벼락 윗면을 경사면으로 바꿨다. 큐브 안에는 공기청정기와 공기정화 식물을 놓아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은 쓰레기 하나 없는 깨끗한 곳으로 변했다. 강 주무관은 “가장 더러운 곳에 가장 깨끗한 시설물을 설치했고 담벼락 위에 물건을 올릴 수 없도록 디자인했다”며 “더러운 여명길 보행로를 깨끗한 보행로로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큐브 설치 이후 만족도 조사 결과, ‘매우 만족한다’와 ‘만족한다’고 답한 비율이 85%나 됐다. 큐브를 지속적으로 이용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비율도 ‘매우 그렇다’와 ‘그렇다’를 합쳐 74%나 됐다. “너무 좋으니 더 만들어주세요.” “공기 좋고 꽃냄새도 나네요.” “힐링되는 공간입니다. 이 공간을 보고 거리 전체를 깨끗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면 좋겠어요.” 시민들 반응도 좋았다.
차도로 통행하는 전동휠체어의 안전을 위해 노면에 색상을 칠해 전동휠체어 통행길을 따로 구분한 모습.
개포동 에스에이치(SH)대치1단지는 지은 지 30년 넘은 영구임대주택이다. 65살 이상 가구 비율이 41%나 될 만큼 노년층 보행약자 비율이 높다. 장애인도 14%나 거주한다. 에스에이치대치1단지 주민들은 맞은편 장애인복지관를 비롯해 복지관 3곳을 자주 이용한다. 하지만 보도가 좁아 전동휠체어를 탄 주민들이 차도를 이용해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항상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도에 하늘색으로 노면을 칠해 전동휠체어 통행길을 구분하는 공공디자인 실험을 했다. 공공디자인 적용 전과 후를 비교했더니, 위험 상황 발생 건수가 33건에서 11건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아파트 앞 하상장애인복지관은 주민들에게 무료 점심을 제공하는데, 항상 대기줄이 길고 혼잡해 전동휠체어끼리 충돌 위험 등 안전 문제가 염려됐다. 강남구는 보행약자, 시각약자, 전동휠체어 등 3개의 대기줄 유도선을 색깔로 구분해 나눈 공공디자인을 적용했다. 복지관 출입문까지 동선을 정돈해 안전을 확보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복지관 무료 점심 이용자 67%가 공공디자인 실험 대기줄을 이용해 동선이 정돈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위험 발생 건수도 절반으로 줄었다.“이 모든 게 주민 삶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죠.” 강 주무관은 “앞으로 공공디자인 실험을 더 활발하게 해 주민 불편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강남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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